완도서 뱃길 50리, 언덕에 서면 푸른 그리움 | ||||||
#1 봄이 아닌 다른 계절의 청산도는 상상할 수가 없다. 뭍의 강이 얼어붙고 들판이 메마르던 날들에도, 청산도만은 초록 보리가 순을 내밀고, 노란 유채꽃이 돌담 아래서 졸고 있을 것 같았다. 입속으로 가만히 ‘청산도, 청산도’ 불러보면, ‘풀잎, 풀잎’이라고 속삭일 때처럼 맑은 휘파람이 감돌았다. 그래서 ‘봄의 왈츠’라는 제목의 드라마가 2,000여개에 이르는 남해의 섬 중에서도
봄섬, 청산도를 무대로 택한 모양이다.
청보리는 맑은 연둣빛의 순을 틔워냈고, 돌담 너머 마늘밭은 짙은 초록으로 물들었다. 마을 뒤 우뚝 솟은 범바위에는 분홍 진달래가 점점이 피어 있었다. 노란 유채꽃은 이달 20일이면 만개한다. 봄이 오는 데에도 절차와 순서가 있는 법. 들판에서 산으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전진한다. 청산도는, ‘언제 오나, 언제 오나’ 읊조리던 봄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현실로 다가오는’ 섬이다.
구불구불 휘어진 길, 낮은 돌담, 수건을 두르고 밭일 하는 어머니, 털털거리는 경운기…. 관광객들은 청산도에서 오래 전 잃어버린 고향의 모습을 읽는다. 그러나 청산도 사람들은 ‘모르는 소리’라고 손을 내젓는다. 섬이지만 어업보다 농업이 발달했다. 바닷일은 남자들이, 밭일은 여자들이 맡았다. 완도에는 ‘속 모르면 청산으로 시집가지 마라’는 말이 있다. 거기다 ‘청산 가서 글자랑 하지 마라’는 말 그대로 청산도 남자들은 학문이 높았고 풍류가 넘쳤다. 정성희 청산면장(55)은 “똥장군 지고도 한시를 읊던 게 청산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남자들이 글 읽을 때, 여자들은 돌을 쌓아 논밭을 만들고 벼, 마늘, 보리, 콩을 심었다. 청산도 전체 논의 30% 정도가 구들장논. 60도 이상의 급경사 산자락에 돌을 쌓고 흙을 부려 만든 계단식 논이다. 물이 귀했던 만큼 윗논의 물이 지하 수로를 따라 아랫논으로 내려가도록 했다. 2m 높이의 논을 쌓아올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땀과 거친 손들이 필요했을까. 그래도 논은 부족했다. 오죽했으면 ‘청산 처녀는 시집가기 전 쌀 세 말을 못 먹고 간다’는 말이 전해 내려왔을까.
지금은 완도행 배 선착장일 뿐인 도청리가 당시엔 남해 어업의 중심지였다. 당시 인구 1만3천여명. 도청리 뒷골목엔 외지에서 온 술집 종업원이 2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자식을 목포, 부산, 서울, 일본에까지 유학시켰다. 서울 영등포와 당시 뱃길 종점이던 부산 영도엔 아직도 청산도 출신 판·검사, 교수, 부자들이 많단다. 저인망 어업으로 인해 고등어, 삼치가 고갈되다시피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81년 다도해 국립공원 지역으로 지정되면서 개발도 불가능해졌다. 어쩌면 불행이고, 어쩌면 다행이었다. 개발의 손을 타지 않은 덕에 청산도는 옛 농촌 풍경을 고스란히 보존할 수 있었다. 93년 개봉한 영화 ‘서편제’에서 주인공들이 어깨를 들썩이고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넘는 고개가 바로 청산도 당리
언덕이다. 황톳길은 주민들의 요구로 시멘트로 포장되었다가 관광객들의 성화에 복원, ‘황톳빛 시멘트길’로 절충됐다. 초가에는 영화 속 장면을 재연한 배우 오정해씨와, 배우였지만 이제는 문화부장관이 된 김명곤씨의 밀랍인형이 세워져 있다. 언덕 꼭대기에는 KBS 드라마 ‘봄의 왈츠’ 세트장이 생겼다. 흰 벽에 파스텔톤의 창틀을 가진 예쁜 이층집. 5월 중순 드라마가 끝나면
관광객들에게 공개된다.
왼쪽으로는 읍리 마을의 파랗고 빨간 지붕과 계단식 논이, 오른쪽으로는 도락포구 앞으로 터진 바다가 훤히 보인다. 바다에서 당리로 오르는 언덕 곳곳엔 노란 유채꽃이 피어있다. 원래 있던 유채밭에 드라마 촬영을 위해 꽃을 더 조밀하게 심었단다. 밭과 밭의 경계는 거무튀튀한 돌담. 지게를 지고 돌담 사잇길을 걸어가는 농부의 모습도 드문드문 보인다. 그 흔한 박물관도, 체험장도 없다. 그래서 이 섬이 좋다. 돌아다닐 필요도 없고, 기웃거릴 데도 없다. 햇볕 좋은 돌담 아래 가만히 앉아 유채꽃과 더불어 꾸벅꾸벅 졸 수 있는 곳. 청산도가
‘봄섬’으로 기억되는 이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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