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이 있는 여행(KBS-TV) - 거문도 편(2010. 9월 방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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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역사는 풍경이 되고 - 거문도 그마저도 포근히 품에 안아 섬의 풍경을 빚어간다
1885년 섬을 무단으로 점령한 영국, 러시아와 협상을 벌이던 청나라 제독은 거문도 주민들과 자주 필담을 나누었는데 그때마다 섬사람들의 학식과 뛰어난 문장력에 감탄하였다. 그 명맥은 지금도 이어져 거문도 곳곳에서 글을 쓰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거문도가 고향이라는 한 소설가는 지금도 그곳에서 머물며 바다를 노래한다.
세 개의 섬이 바다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섬이 거센 파도를 막아주니 안쪽 바다는 바람 한 점 없는 호수같이 잔잔하다. 그야말로 천혜의 항구인 셈. 어린 수병의 무덤은 낡은 흔적이 되어 거문도의 쓸쓸한 역사를 말해준다. 영국 군인들을 상대로 한몫 잡으려는 일본인들도 대거 거문도로 들어왔다. 그들은 고도에 자리를 잡아 집을 짓고 길을 냈다. 해방 직전까지 일본인들은 거문도의 주인 행세를 했고 지금도 남아 있는 일본 양식의 주택은 섬의 풍경이 되어 아픈 역사를 반추하게 한다.
거문도까지 가서 백도를 보지 못했다면 그건 진정으로 거문도를 본 것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백도는 거문도를 이루는 풍경 중 제일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원래는 섬이 백 개쯤 된다고 해서 백도(百島)라 하였으나 자세히 헤아려보니 백에서 하나가 모자라 일백(百 )자에서 한일(一)자를 뺀 흰백(白)을 쓰는 백도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병풍처럼 늘어선 병풍바위, 피아노 바위, 빨래바위.. 이름만큼 다양하고 제각각인 바위들은 푸른 바다와 어울려 그 자태를 뽐내며 절로 탄성을 쏟아내게 한다. 그래서 백도는 다도해의 해금강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 백도는 들어갈 수 없다. 섬의 생태를 보호한다는 것이 그 이유다. 섬을 찾은 객들은 배를 타고 섬 주위를 맴돌며 그 아쉬움을 달랜다.
갈치잡이 배들의 어화다. 거문도 은갈치를 잡는 방법은 독특하다. 오징어잡이처럼 한밤에 집어등을 밝히고 여러 개의 바늘이 달린 낚싯줄에 일일이 꽁치를 꿰어 고소한 갈치구이와 칼칼한 갈치조림, 갈치국까지....즐거운 미각 여행이다.
1905년 처음 불을 밝힌 거문도 등대에도 역사의 아픔이 묻어 있다. 등대 기획은 일본인이 맡았으며 렌즈는 프랑스제였고 공사는 중국인 기술자가 맡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인 팔미도등대가 불을 밝힌 건 1903년, 불과 2년 뒤 거문도에도 등대가 세워졌다는 건 이곳이 전략적 요충지였다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100여 년의 세월 동안 매일 15초마다 한 번씩 불빛을 밝혀 온 거문도 등대. 등대는 처음 식민의 등대로 건립되었지만 이제는 슬픈 역사를 뒤로 한 채 거문도 바닷길의 안전을 지키는 생명의 등대가 되어 거문도의 풍경을 이루고 있다. (출처 ; KB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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