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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이야기/미디어 이슈

31년전 오늘, 서울에서 있었던 일

by 삼도갈매기 2010. 10. 27.

 

 

오늘 아침도 날씨가 무척 차갑다

31년전 오늘,1979년 10월 27일 그날 아침도 이렇게 차가운 날씨였다.


그날 새벽 6시,  누군가 호루라기를 불며 각 방문을 두르리면서 “기상~기상~”을 외친다

다른날 처럼 벽에 걸린 스피커에서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늘쌍 듣던 새마을 노래 대신 호루라기 소리와 문 두드리는 소리에 부시시 일어나

이불을 정리정돈하고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어둠이 가시지않는 운동장에 모였다.


10월 하순, 서울의 새벽 날씨는 제법 추웠으나 

점호를 위해 각 내무반 별로 운동장에 집합 후 인원점검을 마치고 아침체조를 준비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징후가 우리가 모여있는 운동장 주위를 엄습한다,

아침마다 울리던 새마을 노래가 스피커를 통하여 운동장에 들리지않는 것도 이상했지만,

“국민체조 시~작 하면서 나오는 구령소리도 나오지 않고, 인원현황을 보고받을 교관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후 지도 교수 한분이 운동장으로 걸어 나오시더니

“각자 분임반으로 들어가서 별도 지시가 있을때까지 기다리세요” 라고 한다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금 나왔던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면서 한마디씩 거든다

무슨 일이야?...오늘 이상하네?”...이방 저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누군가 라디오를 듣던 교육생 한사람이 보륨을 크게 틀며 소근거리는 목소리로...

“대통령이 유고중이라고 하는데...왜 유고중인지 자세히 알려주지않는다라고 한다


그랬었다

1979년 10월 27일, 나는 서울 원효로 근처 교육원에서 회사 업무와 관련된 교육중이였다

10월 1일부터 6주간 일정으로 교육을 받고 있었는데 10월 27일 아침 풍경이 그랬었다

늘쌍 들리던 “새마을 노래” "국민체조 시작“ 소리는 들리않고 대통령이 유고중이라고만 하면서

오전 교육을 일체 하지 않고 교육생들에게 자습만 시켰었다


오후가 되니 오전보다는 자세한 내용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어제 저녁 대통령이 궁정동 안가에서 휴식중 경호원의 총기 오발사고로 인하여

부상을 입고 수도육군병원에서 응급처지 중이다라는 짧막한 뉴스가 흘러 나온다

그로부터 몇시간 후 교육생중 한사람이 속삭이 듯이 조용하게 새로운 뉴스를 전한다

“대통령이 궁정동 안가에서 누군가의 총탄에 의해 피살되었다”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국가 비상사태이니 우리가 받고 있는 6주간의 교육이 무효가 될지 모르며

내일쯤 각자의 부서로 되돌아갈지 모른다고 하면서 걱정을 한다


열흘전에 부산에서 태어난

귀여운 딸내미도 보지 못하고 힘들게 교육을 받았는데 무효가 되다니,

걱정이 앞서고 괜시리 짜증이 나기 시작하였다......(이하 생략)


지금 생각해봐도....31년전 10월 27일 그때의 기억이 생생히 떠오른다

그후 고인이 되신 박정희 대통령의 장례식은 9일장으로 엄숙히 치루었고 

무효가 될거라고 걱정했던 교육은 11월 10일까지 6주간을 무사히 마치고

부산으로 내려와서 사랑하는 딸과의 첫 대면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날이 바로.....31년전 오늘이였다  

 

 

(참고 ; 사건은 10월 26일 저녁이었으며, 다음날인 27일 아침에 사건을 인지함)

 

  


 

 

 

 

"바로 오늘 저녁에 내가 해치운다.”

김재규(金載圭)가 부하들을 불러놓고 낮게 뇌까렸다.

1979년 10월 26일 오후 6시가 막 지날 무렵,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그리고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과 함께

궁정동 안가(安家)의 연회장 만찬 자리에 앉았다가 약 40분쯤 지나서 밖으로 나왔다. “각하까집니까?”

중앙정보부 요원인 김재규의 부하 하나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가는 아래쪽으로 누이며 묻자 김재규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권총을 점검한 김재규는 늘어선 부하들에게 눈길을 주더니 다시 만찬장으로 들어갔다.   

대학가요제 출신이자 당시의 히트곡 ‘그때 그 사람’으로 유명한 가수 심수봉이 기타를 반주하고

박정희 대통령이 모델 신재순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는 저녁 7시 40분이었다..... 탕! 탕! 

"벌레만도 못한.......”

김재규가 욕설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차지철에게 권총을 발사한 그 시간이기도 하다.

“뭣들 하는 거야!”

놀란 박정희가 버럭 소리를 질렀고, 차지철이 총탄에 맞은 팔을 부여잡고는 “경호원, 경호원!”하고 외쳤다.  

차지철에게 먼저 총을 발사한 김재규는 4, 5초가량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정좌한 채 질끈 눈을 감은 박정희의 가슴을 향해서였다. 그리고 다시 발사가 되지 않자 김재규는 만찬장 밖으로 나갔다.

김재규 측의 중정中情 요원들은 대기실과 주방에서 차지철의 부하들인 경호원들에게 총을 난사해대고 있었다.

 

“각하, 괜찮으신가요?” 

김재규가 나간 사이 심수봉과 신재순이 피에 흥건히 젖은 대통령을 부축하자

“나는 괜찮아......”라며 몸을 움찔했다.

다시 부하의 권총을 들고 와 차지철을 쏜 김재규가 박정희의 머리 가까이 총구를 겨누는가 싶더니 그예 한 시대의 막을 내리고 만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충남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했다가 헬기를 타고 청와대로 돌아오다가 서울 상공을 한 바퀴 돌게 했다.

지난 18년 집권기간 중에 이뤄놓은 ‘한강의 기적’을 눈에 담아두려 했던 것이었을까.

그래서 경제성장을 이룬 자신의 업적에 스스로 감동했던 것일까.

그 감동 속에 유신維新이라는 멍에가 완전히 감춰지고 말았던 건 아닐까.  

공화당은 1972년 이른바 10월 유신을 단행해 제3공화국 헌법을 폐기하기에 이른다.

긴급조치권, 국회의원 정수 3분의 1의 실질적 임명권,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간접선거 등

막강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6년 연임제의 제4공화국 헌법을 제정·통과시킨 것이다.

긴급조치를 발동하여 개헌논의를 일체 금지시키고, 언론에도 심대한 제한을 가하였다. 

다시 김대중 납치사건 등으로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박정희 대통령은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을 차단하고자,

1975년 인혁당 재건사건 관련자들을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하여 8명을 대법원 확정판결 이튿날에 사형 집행하는 등

정권 반대세력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더니 급기야 5월 13일에는 유신헌법에 절대적 권한을 부여하는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였다. 

 박정희가 제9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듬해인 1979년,

유신체제는 사상누각(砂上樓閣)처럼 그 위기는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해 8월, YH무역의 여성 노동자들이 폐업조치에 항의해 당시 제1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인다.

즉각 경찰의 투입과 진압, 그 과정에서 한 명이 사망하게 된다.

9월,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뉴욕타임스와의 기자회견에서 미국에 박정희에 대한 지지 철회를 요구했고,

여당인 공화당은 10월 4일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결의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다시 10월 16일에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유신 철폐 시위가 일어나자 18일에는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김재규, 1945년 9월 경북사범대학교를 수료하고 김천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1946년도에 육군사관학교에 입교, 육사 2기로 졸업·임관했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호남비료 사장으로 임명된 그는 6·3사태 때 육군 준장으로 계엄군을 지휘하기도 했으며,

그 후 보안사령관과 3군단장을 역임하다 전역했다. 그리고 다시 1976년 말에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중용(重用)된 김재규는 중앙정보부장 재직 말기에는 대통령의 신뢰를 점차 잃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실질적 2인자로 권력을 좌지우지한 경호실장 차지철과 심각한 마찰을 야기했다.

박정희 대통령과의 대립을 결정적으로 증폭시킨 것은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의 저항, 특히 부마釜馬사태의 처리문제에 있었다.

차지철의 강경노선이 박정희에 의해 채택되자 그동안 차지철의 견제로 불만이 누적되었던 김재규가 10·26사태를 일으킨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의 살해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된 김재규는 시종일관 자신의 행위를 구국(救國)의 일념에 의한

‘10·26민주회복국민혁명’이라는 주장을 폈으나, 1980년 5월 24일 결국 서울구치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 육군 정보국 제1과장을 거쳐

1953년 육군 준장으로 승진한 박정희는 1960년 부산 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과 제2군 부사령관을 지냈었다.  

박정희가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을 역임하던 시절 4·19 학생의거를 계기로 군사혁명을 결심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이미 1950년대에 이승만의 자유당정권을 축출하려는 시도가 있기도 했다.

1960년 5월 8일을 거사일로 정했지만, 그 해 4·19 혁명이 일어나는 바람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것이다.

김종필 중령을 비롯한 육사 8기 등의 지지 세력을 규합하여 그 이듬해인 1961년 5월 16일 새벽에

반공(反共), 친미(親美), 구악(舊惡) 일소, 경제재건 등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제2공화국의 장면 내각을 무너뜨렸다. 

결국 국가권력을 장악한 박정희는 장기집권을 하게 된다.

박정희의 욕심은 새마을운동, 자주국방, 경제성장 노력 등 자신이 해오던 정치력의 대미를 장식하여

이 나라를 더욱 일으켜 세우려는 것일 수도 있었겠지만 결국 아주 오랫동안 국민들을

군사독재정권의 틀 속에 옭아맨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민주주의는 늦어졌고, 시민들은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거리를 조심스레 걸어 다녀야만 했다.

힘으로 권력을 쥐었으므로 그런 성향이 남아있던 건 아니었을까.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게 박정희의 집권명분이었다면, 김재규는 박정희가 없어야만 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다는 신념하에

스스로 구국의 결단을 하기에 이르렀다고 항변했다. 

박정희의 사후(死後). 박정희의 유신도, 김재규의 구국도 자취를 감추고 만다.

다만, 그들이 있던 궁정동 만찬 사건의 총수사권을 쥔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육사 11기 동기들과 하나회 등 자신의 세력을 등에 업고 연이어 12·12사태를 일으켜 권력 장악에 성큼 다가선다.  

역사의 아이러니. 박정희의 죽음,

김재규의 결단은 그저 군사정권의 연장을 야기 시키며 민주주의를 더욱 더디게 했을 뿐이었다.

역사를 곱씹어 보노라면

세계 어느 곳에서도 쿠데타는 혁명이라는 치장으로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기는 하지만

대개 변명과 항변에 불과할 때가 많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성공한 쿠데타는 무조건 옳다고.....

 

모순의 역사 한 페이지를 장식한 두 사람,

김재규의 총에 맞은 박정희는 수도육군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는데, 이때 박정희의 나이 만 62세였다

(국가정보원을 사랑하는 사람들 카페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