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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먼나라(해외)여행

베네룩스3국(6편) - 네덜란드 편(암스테르담 - 반 고흐 미술관 관람)

by 삼도갈매기 2024. 10. 15.

 

베네룩스 3국 여행 6편은 "네덜란드" 편으로, 

네덜란드 수도 암스테르담에 인상파 대표적 화가 "반 고흐 미술관"(Vincent van Gogh Museum)을 관람한 이야기입니다.

 

 

 

 

(반 고흐 미술관 관람 전에 귀에 읶은 "빈센트 반 고흐"를 위한 음악 들어 보세요).

 

 

 

- 반 고흐 미술관(관람) - 

 

반 고흐 미술관은 200여점에 달하는 고흐의 회화 작품과 500여점의 데생을 볼수 있는 곳으로 1973년에 개관한 4층 건물의 미술관으로 작품은 연대순으로 전시 되어 있으며, 1층은 1887~1888년까지의 작품, 2층은 1880~1890년의 작품, 3층은 데생, 4층은 테마별 작품전시로 이루어져 있다. 이외에도 반 고흐와 동시대를 풍미하던 화가들의 작품 50여점과 반 고흐 동생 '테오'와의 편지 등 600여점 소장되어 있는 곳이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 중요정보를 알리는 사진(위).

자세한 작품을 보시려면 아래 "반 고흐 미술관 : 소장 작품"을 클릭하세요(아래)

↓ ↓

반 고흐 미술관 : 소장작품 (naver.com)

 

반 고흐 미술관 : 소장작품

 

travel.naver.com

 

 

 

사진속 반 고흐 미술관(Van Gogf Museum)으로 입장하였다..

입장 후 입구에서 일정액을 지불하면 미술관측에서 제공하는 수신기를 받아서,

그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한국어로 들을수 있다...(나올땐 수신기 반납)

 

 

(참고 ; 반 고흐 작품을 공부하면서 불필요하게 설명을 길게 하여 지루할 수 있으니,

크게 관심 없으면 긴 내용은 읽지 않아도 무방함을 알려드립니다..

 

 

밀짚 모자를 쓴 자화상(1887년 8~9월, 빈센트 반 고흐)

이 작품에서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자유롭게 해석해서 그렸다. 훗날 그는 편지에서 이렇게 썻다, "눈에 보이는 것을 정확하게 그리고 사실 그대로의 색으로 칠하는 것은 우리가 추구해야할 목표가 아닐지도 모른다, 다양한 색체와 기법으로 다르게 표현 할 수 있는 대상을 거울 속에 비친 모습 그대로 그린다면 그건 그림이 아니라 사진에 불과할 테니 말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자신의 한쪽 눈은 파란색으로, 다른 한쪽 눈은 초록색으로 칠했다. 작품의 색이 상당히 바래어 그가 실험했던 다른색의 효과는 더 이상 볼수 없고 그림을 그린 판지는 텅 비어 보이지만 원래 이 그림의 배경색과 그가 입은 덧옷은 보라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강렬한 색의 대비 속에 그가 쓴 노란색 밀짚 모자는 더욱 돋보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나 자신을 아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고 하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을 그리는 것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야"

 

- 빈센트 반 고흐가 1889년 9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

 

미술품을 자세히 보시려면 사진을 클릭하세요.

 

 

누에넨 개신교회를 떠나는 신도들(빈센트 반 고흐, 1884년 ~ 1885년)

어머니가 다리가 부러져 침상에 누워 지내는 동안, 어머니를 위해 이 작은 교회를 그렸다, 그림 속에는 당시 반 고흐 가족이 거주했던 누에넨 마을의 풍경뿐 아니라 그의 아버지가 설교했던 교회 건물도 그려져 있다, 반 고흐가 부모님께 선물한 첫번째 그림이라는 사실 만으로도 애정이 어려 있는 작품이다, 또 앙상한 가지 위에는 갈색빛 담과 같은 색조로 가을색 나무잎을 그려 넣었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파랗고 하얀 하늘은 그림 앞쪽 갈색과 황토색과 아름다운 대조를 이룬다.

 

 

 

가을의 포플러 나무 길(1884년 10월, 빈센트 반 고흐)

포플러 나무들이 늘어선 반듯한 길 끝에 집이 한체 서 있고, 그림 앞쪽에는 사람이 서 있다, 반 고흐는 이 그림에서 원근법을 연습한 것 같다, 교회 기둥 처럼 하늘로 뻗은 빽빽한 포플러 나무 줄기들과 상복을 입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외로운 여인, 길 끝에 빛을 비추는 파란 하늘이 어딘지 모르게 우울한 분위기를 풍긴다.

 

 

 

사진을 클릭하면 사진에 대한 설명을 볼수 있습니다.

 

 

감자 먹는 사람들(빈센트 반 고흐, 1885년 4월~5월)

누에넨에 있는 농부의 어두운 오두막 집에서 반 고흐는 <감자 먹는 사람들>의 작업을 시작했다, 이 작품이 자신의 첫 걸작이 될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몇달의 시간을 들여 희미한 등불 아래 다섯 식구가 둘러 앉아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찐 감자를 먹는 모습을 그렸다, 작업은 쉽지 않았다, 그떄까지 빈 센트는 항상 한명의 모델을 화폭에 담아 왔지만 이번에는 여러명의 인물을 그려야 했고, 그 인물들 간의 관계도 표현 해야 했다, 좁은 공간 안에서 가족들의 위치를 결정해 앉히는 것도 어려운 일이였다, 이 작업은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싸움이였다. "희미한 조명 아래 감자를 먹고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자기 손으로 땅을 갈아 먹을 것을 수확 한다는 깨달음을 얻길 바란다" 이를 위해 그는 그림속 농부 가족의 얼굴을 "껍질 그대로의 지저분한 감자 색채"로 칠했다.

 

 

 

 

신발(1886년 9월~11월, 빈센트 반 고흐)

세상 많은 화가 신발 중 이 작품속 신발보다 유명한 것이 또 있을까?, 이 작품에서 반 고흐는 너무 많이 신어 낧고 초라한 자신의 신발을 그렸다. 이 신발은 화가로서 그가 걸어야 했던 험난하고 긴 여정을 상징하는 것일까? 끝없이 걸어야만 했던 네덜란드와 벨기에 에서의 힘든 여정을 나타내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신발이 낡고 닳은 면이 한 번 그려 보고 싶었던 것이였을까? 반고흐 친구에 따르면 그는 이 신발을 벼룩시장에서 사서 험하게 신고 다니다가 신발을 그렸다고 한다, 이 그림에서 그는 다양한 색조의 갈색을 이용해 빛에 따라 달라지는 면을 표현했다.

 

 

 

씨 뿌리는 사람(1888년 11월, 빈센트 반 고흐)

그는 밭 한가운데 이젤을 세워 풍경을 그렸고 화실에 모델을 세워 인물을 묘사했다. 씨 뿌리는 사람은 이전에도 즐겨 그렸는데, 자신이 존경하는 화가, 장 프랑스와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노력했다.

 

 

 

헤이그 근처의 튜립밭(클로드 모네, 1840~1926)

"지극히 아름다운 꽃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그건 가여운 화가를 미쳐 버리게 만들기 충분한 풍경이다" 네덜란드를 방문한 모네는 방대한 튜립밭을 보고 흥분과 절망에 사로잡려 이렇게 편지를 썼다고 한다, 이에 반 고흐는 모네의 화풍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회색 펠트모자를 쓴 자화상(빈센트 반 고흐, 1887년 9월~10월)

이 자화상은 반 고흐가 파리에 머물며 했던 수많은 실험중 가장 과감한 인상파적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 전체를 짧은 붓터치로 그렸다, 이 자화상에서 자신의 얼굴에는 빨강과 초록을 주로 사용했고, 배경의 파랑에는 주황색 악센트를 주어 신비로운 후광 효과를 냈다.

 

 

 

클리쉬 대로(빈센트 반 고흐, 1887년 3월 ~4월)

몽마르뜨 가장자리에 위치한 클리쉬 대로는 활기 넘치는 파리의 중심지였다, 이 대로의 오른쪽에 살면서 코르몽 화실에서 작업했고, 그와 잠시 교제했던 여인 아고스티나 세가토리는 근처에서 카페 겸 레스토랑을 경영했다, 화려한 색체로 즉흥적으로 그린 그림에서 반 고흐는 파리에서 배운 인상파 스타일을 시도했다.

 

 

 

카페에서, 르탱부랭의 아고스티나 세가토리(빈센트 반 고흐, 1887년 1~3월)

그림속 여인은 카페겸 레스토랑이었던 르탱부랭의 여주인이자, 반 고흐의 연인으로 유명했던 아고스티나 세가토리다, 그는 자신의 가게인 르탱부랭에서 포즈를 취한 아고스티나를 그렸다, 이 그림의 배경에는 희미하게 일본풍 그림이 보인다.

 

 

 

고흐의 방(빈센트 반 고흐, 1888년 10월)

"이 번에는 그냥 내 방이야" 빈센트는 테오에게 자신이 최근 그린 그림의 일상적인 모티브에 대해 설명하였다,고흐는 노란집의 작고 안락한 자기방에 소박한 가구를 놓았고 벽에는 자신의 그림을 걸어놓았다. 방벽이 기울어져 이상해 보이지만 그 방의 벽이 실제로 기울어져 그렇게 그린 것이다.

 

 

 

미술관 근처에서 공부하는 어린 학생들이 견학을 온 듯, 

선생님(붉은 상의 걸친 여인)과 "고흐의 방" 앞에서 그림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해바라기(반 고흐 빈센트, 1889년 1월)

"마르세유 사람이 부이야베스 생선 수프를 먹는 것 처럼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중이다" 반 고흐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훗날 그의 작품중 가장 유명해질 해바라기 그림을 그리며, 위풍 당당하게 곧게 선 해바라기, 고개를 떨군 해바라기, 반쯤 핀 해바라기 등 다양한 형태의 해바라기를 그렸다, 고갱을 위해 새로운 해바라기 그림을 그렸고, 그렇게 탄생한 그림이 바로 이 작품이다, 반 고흐는 이 그림을 두고 '보면 볼수록 다체롭게 느껴지는 작품'이라고 자평했다.

 

 

 

생트 마리 해변 풍경(빈센트 반 고흐, 1888년 6월)

물감과 화구를 챙겨 차를 타고 해변으로 향했다, 그를 반겨준 바다 풍경은 어름다웠다, 고흐는 빛나는 하늘 아래 새파란 색으로 바다를 그렸다, 다양한 색채를 덧칠해 이런 효과를 냈는데, 부서지는 파도를 표현하기 위해 하얀색과 노란색 물감을 사용하고 투명한 효과를 내기 위해 팔래트 나이프를 이용했다, 캔퍼스에 빨간색으로 서명해 초록과 빨강의 대비를 강조했다.

 

 


베르사유 길, 로켄쿠르 - 카미유 피사로 作(1830 ~ 1903)

카미유 피사로는 그의 집에서 가까운 로켄쿠르에서 베르사유로 가는 길을 그렸다, 길에는 닭들이 걸어 다니고 마차 옆으로 사람들이 서 있다, 멀리서 마차 두대가 다가오고 있고, 작게 그려진 사람은 나무 그늘 아래 나무가지를 모으고 있다, 이 작품은 피사로의 초기 인상주의 스타일을 대표하는 그림으로, 다양한 색체를 사용해 길의 빛 반사효과를 연출하였다.

 

 

 

19세의 빈센트 반 고흐 사진

1853년 3월 30일 준데르트에서 태어난 빈센트는 16세의 나이에 숙부가 운영하는 구필화랑의 헤이그 지점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반 고흐는 즐겁게 일했다, 어려서 부터 불안정하고, 키우기 쉽지 않았던 빈센트가 취직을 하는 모습에 부모님은 안도했다. 빈센트는 일반 초등학교와 중학교 과정도 마치지 못하고 자퇴한다.

 

 

 

모과, 레몬, 배 그리고 포도(빈센트 반 고흐, 1887년 9월 ~ 10월)

해바라기 이전에도 그는 종종 노란색을 써서 그림을 그렸는데, 그중 한 작품이다, 지금까지 내려온 유일한 원본 액자까지 노란색으로 칠함으로 이런 효과를 더욱 강조했다, 왼쪽 자신의 서명 아래에는 '내 동생 테오에게'라는 붉은 색으로 글써서 동생에게 선물했다.

 


추수하는 사람(밀레 그림 모작) - 빈센트 반 고흐 作, 1889년 9월

반 고흐는 1889년 9월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발작에서 회복 중이라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아서 그가 좋아 하는 화가들의 작품을 모사하기 시작한다,, 요양원에 갇혀 작업하는 동안 열정은 사그러 들려고 하고 있었으니, 그런 상황에서 모사 그림은 그에게 새로운 에너지를 가져다 주었다..

 

 

 

관람객들은 각층을 따라 벽면에 걸린 그림을 감상하고 있으며, 

천장 한켠에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들이 슬라이드 형식으로 벽면을 장식되고 있다.

 

 

화가의 자화상(빈센트 반 고흐, 1887년 12월~1888 2월)

이 그림은 반 고흐가 파리를 떠나 아를로 가기전에 마지막으로 그린 자화상으로, 이 작품에서 자신을 팔렛트와 붓을 손에 들고 이젤 위 켄버스를 바라보는 진짜 화가로 표현했다. 밝은 색체와 자유분방한 붓놀림으로 그림을 그리는 현대적인 화가로 표현, 그는 여동생 빌레미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거울을 보며 이 자화상을 그렸다고 말했다, 또한 이 자화상은 반 고흐가 파리에서 보낸 마지막 시기에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를 보여준다.

 

 

 

빈센트 반 고흐와 그의 동생 태오 반 고흐가

서로간에 주고 받았던 600여통의 편지들을 모아 두었던 서랍장

 

 

 

건초 만들기(레옹 오귀스탱 레르미트(1844~1925)

레르미트는 건초를 만들다 잠시 쉬는 농부들의 친밀한 순간을 역동적인 구조를 이용해 실물 크기로 사실적으로 그렸다, 그는 관객의 시선을 소매를 접어 올리고 벌초 낫을 고치고 있는 햇볕에 그을린 나이든 남자에게서 젊은 부부를 지나 갈퀴와 쇠스랑을 들고 어른들을 미심쩍게 바라보고 있는 아이로 단숨에 이동하게 만들었다. 그림속 3대는 각기 유년시절, 성년, 노년을 의미하고 큰 낫처럼 죽음을 나타내는 익숙한 상징은 인생의 끝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삶의 무상함과 덧없음을 암시한다, 1889년 이 작품은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그랑프리 상을 수상했다.

 

 

 

 

꽃 핀 복숭아 나무(빈센트 반 고흐, 1888년 4월)

반 고흐는 복숭아 나무에 열린 꽃잎 하나하나를 셈세하게 그려 넣었다, 나무 위로 멧노랑 나비가, 그 오른쪽 아래로는 주황색 갈고리 나비가 날고 있다, 그는 이 그림의 배경으로 녹색, 파란색, 노란색 선을 그어 일정한 패턴을 만들고 지평선에는 몇채의 집도 그려 넣었다. 거칠고 셈세하게 두껍고 가늘게 그리기 등 다양한 방식을 적용해 그림을 그렸다.

 

 

 

사진을 클릭하면 사진에 대한 설명 글을 볼수 있습니다.

 

 

 

글라디올러스와 과꽃이 있는 화병(빈센트 반 고흐, 1886년 8월~9월)

"꽃을 그려서 색체 공부를 했네"고흐는 파리로 이주한 6개월 뒤 친구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그는 붓에 물감을 충분히 묻혀 만개한 글라디올러스를 그리고, 과꽃은 페인트로 만든 것 처럼 보일 정도로 화려한 색체를 두껍게 칠했다, 다량의 정물화를 그려 연인이였던 아고스티나 세가토리의 카페 겸 레스토랑에 전시했다.

 

 

 


커다란 공작나방(빈센트 반 고흐, 1889년 5월 ~ 6월)

반 고흐는 요양원 정원에서 본 커다란 나방을 스케치 했다, 그림속 초록 배경을 바탕으로 세 송이의 아룸꽃이 피어있고, 나방은 꽃 위에 앉으려는 듯 날고 있다, 이 장면은 상상력을 발휘해 설정한 장면이고, 꽃을 피운 다음에야 나타나는 산딸기 열매도 상상하여 그린 것이다, 반 고흐는 이 나방이 안간의 해골 비슷한 무늬가 가슴팍 뒷쪽에 그려진 박각시인줄 착각해 나방의 몸통에 해골 모티브를 그려 넣었다, 사실 이 나방은 커다란 공작나방으로 해당 부위에는 가로 줄무늬가 있었다.

 

 

 

 

나비와 양귀비(빈센트 반 고흐, 1889년 5월 ~ 6월)

반 고흐는 길을 가다 제멋대로 줄기가 뻗어 있는 양귀비를 그렸다,  여린 꽃들과 무거워져 고기를 숙인 꽃봉오리, 그리고 그 사이를 날고 있는 흰나비를 그렸다, 화려하게 장식하지는 않았지만 균형만큼은 완벽하다. 캔퍼스에 색을 칠하지 않아 원래색이 드러나게 했다, 이 떄문에 이 작품은 여린 양귀비 만큼 연약한 특성을 갖는다.

 

 

 

 

4층짜리 미술관으로,

3층 벽면에 걸린 그림들을 감상하고 있다.

 

 

 

반 고흐의 귀가 잘린 모습을 

본인이 자화상으로 그렸다고 한다.

 

 

 

빈센트 반 고흐의 남동생(태오 빈 고흐)의 부인 "요한나"와 그의 아들

<본명 ; "요한나 헤지나 반 고흐-봉허"(Johanna Gezina van Gogh-Bonger, 1862.10. 4 ~1925. 9. 2)>

요한나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중산층 가정에서 아홉이나 되는 많은 형제들 속에서 자랐다. 학교 졸업 후 교사 자격을 얻고 여학교에서 영어 교사를 하던 중 유명 화상에서 일하는 오빠의 친구 테오 반 고흐(Theodorus van Gogh, 1857~1891, “테오”)를 소개받았다. 첫눈에 그녀에게 반한 테오는 다짜고짜 사랑을 고백하고 편지 공세를 펴서 2년에 걸쳐 70통의 편지를 교환한 끝에 요한나와 1889년 암스테르담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 이듬해 큰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받은 아들 빈센트 반 고흐가 태어났고, 이를 기뻐한 화가 빈센트가 〈아몬드꽃〉을 그려 동생 부부에게 선물로 주었다.

1890년 초 생레미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빈센트는 테오가 주선해준 대로 아를을 떠나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파리 근교의 오베르쉬르우아즈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파리에 살고 있는 테오 부부가 빈센트의 뒤를 돌봐주었다. 그런데 1890년 7월 빈센트가 들판에서 그림을 그리던 중 권총 자살을 시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테오가 오베르로 달려갔다. 빈센트는 결국 그 다음날 테오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두고 말았다. 우울증과 죄책감으로 테오 역시 시름시름 앓다가 1891년 1월 3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직 서른살도 안된, 갓난아이가 딸린 요한나는 절망적인 슬픔에 굴하지 않고 무명의 현대화가들을 일반에 소개하기에 힘썼던 남편 테오가 하던 일을 계승하기로 마음먹었다.


<반 고흐 작품의 수습과 홍보 노력>
사람들이 파리 아파트에 가득 차 있는 반 고흐의 그림부터 처분하라고 말했지만 요한나는 수백 점의 유화와 드로잉을 하나도 빠짐없이 수습했다. 또한 남편이 형과 주고받은 편지도 찾아서 모아 두었다. 그리고 이삿짐을 꾸려 고향인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요한나는 암스테르담 동쪽 교외에 있는 부숨에서 하숙집을 차렸다. 무명이나 다름없는 빈센트의 작품을 널리 알리고 그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예술가와 비평가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 살면서 그들의 이해를 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고흐의 그림이 걸려 있는 요한나의 하숙집은 지식인과 예술가들의 집합소가 되었다. 요한나는 반 고흐를 기리는 작업에 본격 착수하는 한편 그 내용을 일기에 자세히 기록했다. 그녀가 외아들에게 아빠와 삼촌이 아주 훌륭한 일을 했고 엄마는 그 중요한 일을 이어받아 하고 있음을 전해주기 위함이었다. 요한나는 1900년까지 네덜란드 전역에서 일부 평단의 빈축을 사기도 했으나 수십 회의 반 고흐 회고전을 열어 그를 알렸고 독일, 프랑스의 유수 화상들과 접촉해 고율의 커미션을 제시해 가면서 전 세계 미술관과 개인 컬렉터들에게 작품을 팔았다.


<재혼 후의 활동>
빈센트 반 고흐 사후 약 10년간의 노력이 결실을 보던 1901년 요한나는 화가인 요한 호스할크(Johan Cohen Gosschalk, 1873~1912)와 재혼하였다. 요한나는 1905년 스테델레이크 미술관(Stedelijk Museum, 지금은 현대미술작품을 주로 전시)을 빌려 반 고흐 회고전을 크게 열었다. 그와 아울러 빈센트와 테오가 주고받았던 700통 가까운 편지를 정리해 1914년 화란어와 독일어로 《형에게 보내는 편지》를 출간했다. 그리고 1914년에는 유트레히트에 있던 테오의 묘를 오베르쉬르우아즈에 있는 형 빈센트의 묘지 옆으로 옮겼다. 형제의 남다른 우애에 감동 받은 사람들이 반 고흐를 가슴 깊이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요한나는 반 고흐 사후 30여 년간 1924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판매한 〈해바라기〉를 비롯해 190점의 작품과 55점의 드로잉을 중요 미술관이나 영향력 있는 개인 소장가들에게 팔아 그 가치를 높였다. 1915~1919년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반 고흐의 서간집을 영어로 번역 출간하는 일을 도맡아 했다. 요한나는 죽음에 임박해서도 빈센트의 나머지 편지를 영역하는 작업에 매달려 있었다. 

 

<요한나 아들의 활동>

1925년 요한나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아들 빈센트(Vincent Willem van Gogh, 1890–1978)가 그 사업을 이어받았다. 빈센트는 1930년 요한나로부터 상속받은 모든 작품을 스테델레이크 미술관에 기탁했다. 반 고흐의 명성이 계속 높아가자 미술관 건립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1962년 네덜란드 정부는 미술관 건립을 약속했다. 빈센트는 모든 작품을 정부 주도로 설립된 ‘반 고흐 재단’에 양도하고, 반 고흐 재단은 컬렉션을 반 고흐 미술관에 영구임대하는 형식을 취하기로 했다. 마침내 암스테르담의 국립박물관 앞에 네덜란드의 건축가가 설계한 반 고흐 전문 미술관이 세워지고 1973년 정식 개관하였다.

 

(요한나 이야기를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아래 영상을 보시면 도움이 됩니다,

위 글을 읽지 않았다면 아래 영상이라도 보시기 바랍니다)..

 


빈센트 반 고흐를 유명인으로 만든 사람 ; "요한나"의 생애

 

 

 

윤경씨, 빈센트 반 고흐 미술품 잘 보았는교?

빈센트 반 고흐의 남동생(태오 반 고흐)의 부인 "요한나"의 삶을 조금 배우시오...ㅋ

 

 

미술품을 자세히 보시려면 사진을 클릭하세요.

 

 

해바라기를 그리는 빈센트 반 고흐(폴 고갱, 1848~1903)

이 작품에서 폴 고갱은 친구인 반 고흐가 자신이 좋아하는 해바라기를 그리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고갱은 해바라기가 자라지 않는 겨울에는 상상력을 동원해 그림을 그리고, 반면 반 고흐는 사실에 기반해 그림을 그리는걸 선호해서 의견차이가 분분했다.하지만  반 고흐는 고갱이 그린 이 그림 속 자신의 모습에 공감했다, 

 

 

 

자화상 - 샤를 라발 作,(1861 ~ 1894)

샤를 라발은 이 작품에서 반쯤 열린 창문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이 그림을 통해 반 고흐에게 자신도 자연에서 영감을 받는다고 말하고 싶었던 같다, 두 사람은 실제로 만난적이 없었다, 라발은 창틀에 "내 친구 반 고흐에게" 라고 쓰고 이 그림을 그에게 바쳤다, 이 그림 또한 화가들의 자화상 교환을 위해 그려진 작품이다.

 

 

에밀 베르나르의 초상화가 있는 자화상(레미제라블) - 폴 고갱 作(1848 ~ 1903)

빈센트 반 고흐는 폴 고갱과 에밀 베르나르에게 편지로 서로의 초상화를 그려 자신의 자화상과 교환할것을 제안한다,  결국 세사람은 서로의 초상화를 그리는 대신 친구의 초상화가 걸린 배경을 바탕으로 자신의 초상화를 그렸다, 고갱은 반 고흐에게 자기 자신을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처럼 도둑의 가면을 쓰고 형편없는 옷을 입었지만 강력한 사람"으로 그렸다고 설명했다. 

 

 

 

 

붓꽃(빈센트 반 고흐, 1890년 5월)

열정을 가지고 꽃 정물화 몇점을 그렸는데, 붓꽃 다발을 그린 이 그림도 그중 하나다, 이 작품은 시선의 각도와 배경, 화병까지도 그의 작품 <해바라기>를 연상 시킨다, 하지만 같은 색상의 다양한 색조를 이용한 <해바라기>와는 달리 이 작품에서 색의 대비를 적극 활용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물감의 붉은 염료가 변색하면서 파란빛을 띠게 되었다.

 

 

 

생폴 요양원의 정원('떨어지는 나뭇잎') - 빈센트 반 고흐, 1889년 10월

1889년 5월 8일 반 고흐는 생레미드프로방스에 있는 생플 드 모졸 요양원에 자발적으로 입원했다, 극도의 나태함에 빠지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다.10월 요양원의 안뜰에서 그린 것으로 가을색과 홀로 산책하는 사람, 떨어지는 나뭇잎이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요양원의 정원(빈센트 반 고흐, 1889년 12월)

화가는 친구 에밀 베르나르에게 쓴 편지에서 "지금 있는 요양원 풍경이야" 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림속 풍경을 설명하면서 번개 맞아 부러진 나무를 "자긍심에 상처입은 우울한 거인"이라고 묘사한다. 이 작품에서 화가는 의도적으로 적갈색과 진한 녹색을 함께 쓴 이유로 "나와 함께 지내는 사람들은 불안에 시달려 그걸 화가 난다고 표현하지, 그 불안한 감정을 상기 시키고 싶었어"라고 말했다.

 

 

 

석양 풍경(빈센트 반 고흐, 1890년 6월)

석양에 비치는 이 그림은 하늘이 짙은 노랑으로 변하고 빛이 땅위로 쏟아져 따뜻하게 빛나는 찰나의 순간을 담았다,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지평선의 오베르성과 비옥한 들판을 그리고 검정색과 녹색으로 배나무를 채색해 역광을 강조했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나무 잎을 뚫고 나오는 햇볕을 바라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떠야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나무 뿌리(빈센트 반 고흐, 189년 7월)

반고흐는 나무의 '뒤틀린 뿌리'가 삶의 투쟁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한며, 이 현상은 그가 당시 겪고 있던 투쟁을 나타낸다, 자신을 실패작이라 여기며 미래를 걱정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감 넘쳐나는 그림을 여럿 그렸다,  7월 27일 안타깝게도 이 작품을 미완성으로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빈센트 반 고흐, 1890년 7월)

이 그림은 고흐가 남긴 최후의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밀밭 사이로 난 길이 삶의 끝인 죽음을 상징하며 그의 자살을 암시하는 우울한 기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추축하지만 그건 낭설일뿐, 이 작품 이후에도 몇점의 그림을 더 그렸다, 이 작품속 파란 하늘은 노란 밀밭을 돋보이게 하고, 붉은 빛이 도는 땅은 초록 빛을 더욱 밝게 빛나게 만들어 준다.

 

 

 

옥상 전망대에서 밖의 풍경을 담아 본다...

1시간쯤 그림 감상 했더니 머리가 아파 잠시 전망대로 나왔다...

 

 

꽃 피는 아몬드 나무(빈센트 반 고흐, 1890년 2월)

반 고흐는 동생 테오와 그의 부인 요한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위해 이 <꽃 피는 아몬드 나무>를 그렸다, 아기가 태어 났다는 소식을 듣자 마자 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주 이른 봄 꽃을 피우는 아몬드 나무는 새로운 생명을 상징한다, 이렇게 기쁨을 주는 긍정적인 그림을 그리는 그가 발작 직후에 그렸다는 것은 믿기 힘든 사실이다, 반 고흐의 가족에게 이 작품은 가장 소중한 그림으로 남았다.

 

 

 

잠시 복도에 나오니...

"꽃 피는 아몬드 나무" 의 영상이 벽면 가득 채우고 있다.

 

빈센트 반 고흐가 여동생 발레미나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고 한다.

"테오 부부가 낳은 아기를 위해서 제법 큰 그림을 그려 주었다, 그들은 피아노 위에 그 그림을 걸었어, 하늘색을 배경으로 꽃피우는 아몬드 나무 가지를 그린 그림이다"라고 했던 그 나무가 벽면 가득 채우고 있었다.

 

 

 

미술관 맨 위층 매장에 "빈센트 반 고흐"관련 책자와 기념품 등을 판매하고 있었다.

해바라기, 꽃 피는 아몬드 나무, 별이 빛나는 밤에" 등 유명한 그림 엽서를 몇점을 구입하고...

 

 

 

한글로 번역된 "반 고흐 미술관 소장 걸작선"(붉은색 화살표)두꺼운 책자를 구입,

(반 고흐 미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구입한 책자에서 부분적으로 옮겼슴)

 

아내가 카운터에서 판매하는 아가씨와 뭐라고 말을 주고 받고 있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사진을 클릭하면 알수 있습니다...ㅋ

 

 

 

약 2시간 동안, 미술관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700여점의 미술품을 감상했던 "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을 손으로 가르키고 있다.

 

 

암스테르담 도심 곳곳에 운하가 있음을 알수 있다..

운하를 따라 일행과 함께 근처 식당으로...

 

암스테르담 쇼핑 거리에서..

 

<네덜란드 여행시 주의 사항>

Dutch Pay(각자 분담) ; 이 말은 17세기 영국과 네덜란드가 식민지 패권을 놓고 대립했었는데, 영국인들이 네덜란드를 뜻하는 "Dutch"를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 네덜란드인들을 비하(卑下)하기 위해 만든 말이였으니,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 말을 듣기 싫어 한다니 주의해야할 듯...

좋은 우리말 있지요?..."각자 분담"...ㅋ

 

다음편은 이번 여행의 마지막 편으로

네덜란드 하면 풍차, 유명한 풍차마을(잔세스킨스)을 여행한 이야기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