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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먼나라(해외)여행

◆ 중국 여행 - 서안(西安, XIAN)

by 삼도갈매기 2006. 11. 21.

 

2006년 11월 16일 ~ 11월 20일(4박 5일간)

중국의 서안, 장가계를 여행 하였습니다

 

그럼, 여러분을 먼저 서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부산 김해 공항에서 중국 서안(西安)까지 비행기로 3시간이 소요됩니다

중국 "서안국제공항" 전경입니다......시차는 서안이 1시간 늦습니다

 

 

진시황의 화려한 왕궁 《아방궁》

 

서안과 중국. 중국역사를 통틀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진시황의 황궁이다.

지금은 그 모습이 남아있지 않고 흔적만이 있지만, 그 흔적만으로도 규모를 알 수 있을만큼 거대하다.

서안시 서쪽 교외에 있는 이 유적지는 동서 2,500m와 남북1,000m의 크기로 앞의 전과 뒤의 궁,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1만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방궁의 건설은 한편으로는 황제의 위엄을 보이기 위함이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황제에게 알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중국을 통일한 후 9년(서기 212년)에는 서주의 풍고근처에 아방궁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처 공사가 다 끝나기 전에 진시황이 죽고, 그 2세가 이어 공사를 계속하게 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아방궁의 크고 작은 전우만 700여 곳에 이르고,

같은 하늘 아래에 있다고 해도 각각의 방이 모두 기후가 틀렸다고 한다.

 

진시황 생전에는 주변의 육국에서 가져 온 보석과 미녀들을 궁내에 보관해 두었고 매일 돌아가며 하루씩 각각의 방에 머물렀는데, 죽을때까지고 다 마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진왕조의 정치제제와 경제가 서서히 붕괴되고 농민봉기가 일어나 항우가 병을 이끌고 함양을 함락시키면서 아방궁도 폐허로 남게 되었다.

 

 

 

 

 

 

 

 

 

약 1,000여명의 중국 역대 명필의 비석이 숲을이룬 《비림박물관》

 

기원 1090년에 건조, 당나라 개성 여간에 새긴 “개성석경” “석대효경”을 소장하기 위해 건조한 것으로 중국 최대의 석조 서고이다.

현재 6개의 진열실, 7개의 회랑, 1개의 비정이 있고, 한나라 이래 역대의 비석묘지 2,300여기가 수장되어있으며, 각 비석에 65만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비림은 중국의 서예 예술 보고로 한나라 시기부터 청나라 시기에 이르는등 각 시기 이름난 서예가들의 필적을 모은 것으로 해서,초서,예서,전서체등 여러 가지가 있다.

 

 

 

 

 

 

 

 

 

 

 

다이야몬드호텔 및 서안역 전경

 

서안의 1급 호텔입니다....침대도 각 방마다 더블침대로 2개씩 이며, 식사도 먹을만 합니다

호텔 맞은편에 서안역(驛)이 있습니다

 

 

 

 

 

양귀비의 온천 별장 《화청지》

 

자고로 이름난 온천지로 당나라 말엽 양귀비(본명 :양옥환)와 현종황제가 사랑을 나눴던 곳이다.

양귀비는 본디 현종의 친아들인 수왕의 아내였으나, 현종의 눈에들어 그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자기 처를 아버지에게 빼앗긴 수왕과 친자식 정도로 나이차가 나는 양귀비와의 사랑에 빠져 스스로 몰락해 간 현종. 그리고 현종의 지시에 의하여, 당이 몰락하는 가운데 자해하여 죽는 미녀 양귀비의 이야기는 중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러브 로망이다.

 

화청지에는 몇군데의 사원외에도 양귀비가 사용한 역지,

서안사변때 장개석이 감금되어 있던 오문가등 생생한 역사의 무대였던 곳이 많이 남아있다.

 

 

 

함께 여행을 했던 회원분들입니다

여행은 눈으로 하지만 이렇게 함께하신 일행분들과의 재미난 생활도 잊을수가 없습니다

 

 

 

 

 

 

 

 

양귀비(본명 : 양옥환)의 동상입니다

조각으로 보아도 아름답습니다......가슴이 탐스러워 한참을 머물렀습니다...ㅎㅎㅎ

 

 

 

아름다운 여인 "양귀비"가 목욕하던 곳 입니다

위에는 독탕, 아래는 현종과 사랑을 나누던 거시기탕 입니다...ㅎㅎ

 

 

 

 

 

사진 위 : 화청지를 축소한 모형도 이며,

사진 아래 :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가 이렇게 앉아서 정치를 했다는 "밀랍인형" 모습입니다

 

 

 

불로장생을 꿈꾸던 《진시황릉》

 

중국을 통일한 최초의 황제 진시황이 여기에 묻혀 있다.

능묘는 38년간에 걸려 완공되었는데 무덤의 높이 76m. 둘레2,000m이다.

측량조사에 의하면 능원은 내외 두성곽으로 둘러졌고 내성의 둘레 2,525m. 외성의 둘레 6,264m이다.

지금까지 능동쪽에서 3개의 진시황릉 병마용갱이 발견되었고 능서쪽에서는 2대의 진나라 구리마차와 말 구리인형이 발굴되었다.

1987년 유네스코는 진시황릉을 세계유산 명록에 넣었다.

 

 

 

 

뒤로 보이는 전경이 진시황이 묻혀있는 거대한 릉(陵)입니다

한참을 걸어 올라가 보니....정상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진시황의 사후세계를 지키기 위해 만든 대 군단《병마용갱》

 

1975년부터 1호갱을 발굴하기 시작,

그 중 당시 사람과 말의 크기만한 도기무사용과 마용 6,000여개,군사진에는 선봉3열 횡대,주체 38로 종대로 진용이 매우 웅대하여 “세계 제 8기적”이라 칭송한다.

경내에는 청동검, 구리창, 쇠내,화살등 실전 무기가 완전하게 보존돼있다.

 

2호갱에는 6,000여기의 병마용이 있어 마치 군대의 통수기구와 흡사하다.

현재 1호갱과 3호갱은 이미 박물관으로 건조되어 대외 개방하고 있다.

 

 

 

 

 

 

 

 

 

 

 

 

 

 

 

 

 

고승 현장이 인도기행에서 가져와 경전을 모셔다 둔 《자은사 - 대안탑》

 

삼장법사로 유명한 고승인 현장은 629년 황제의 허가를 얻지 않고 혼자 장안을 출발하였다.

이후 트르판,사마르칸드를 거쳐 바미얀(아프가니스탄),간다라(파키스탄)를 거쳐 마침내 동경의 땅 천축(인도)에 이르렀다.

카시미르에서 2년체재후 북쪽에서 남쪽까지 인도 각지를 다니고, 16년후인 645년에 150개의 불사리, 8체의 불상, 657부의 경전을 가지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가 지은 대당서역기는 후세에 유럽학자의 발굴 안내서로써 귀중하게 여겨졌다.

또 그가 가지고 돌아온 많은 경전은 직접 번역하였다.

그 번역 작업을 위하여 건립된 것이 대안탑이다.-당나라 영휘 13년(652년).

처음에는 표층은 벽돌로 속은 흙으로 된 5층의 정방형 건물이었다.

후에 10층으로 재건했으나 전란의 파괴로 인해 7층만 남았다.

 

 

 

 

 

 

 

 

중국 역사적 도시 "서안(西安 = XIAN) "

 

면적 9.983㎢, 인구 226만 명(1998)이다.(참고 : 경상남도 면적과 비슷함)

중국 산시성의 성도이며, 행정구역은 8개의 구와 5개의 현으로 나뉜다.

 

서안은 주나라 무왕이 세운 호경에서 비롯되며, 그뒤 한나라에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약 1,000여년  동안 단속적이었으나 국도로 번영한 역사적 도시로 그 동안 장안(長安)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왔다.


 연평균기온 13.3℃, 7월 평균기온 26.7℃, 연평균강수량604mm이다. 성 밖의 동교,서교에는 신흥공업지구가 형성되어 대규모 화력발전소가 건설되고 면방직,기계,항공발동기,비행기제조,전자공업 등이 활발하다.

특히 면방직공업은 규모가 큰 여러공장이 가동되어 생산량이 많은데, 그 원면은 질,양이 다같이 뛰어난 관중분지산의 목화로 충당된다.

역사적 도시로 사적이 풍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