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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장거리 여행

경북 성주군 여행기(전편) - 한개마을, 세종대왕자태실, 선석사 관람

by 삼도갈매기 2011. 12. 20.

 

 

 

 

2011년 12월 18일(일요일)

부산 유유자적 여행자클럽 회원들과 함께 선비의 고장이며, 참외로 유명한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을 여행하였다.

 

이번 성주군 여행은 전통민속마을인 한개마을과 세종대왕 왕자태실이 보관된곳 그리고 태실 근처에 자리한 선석사와

성산동에 자리한 사적 86호인 고분군, 지방민의 후학교육을 위해 세웠다는 "회연서원" 그리고 무흘구곡의 장엄한 풍경과

500년된 왕버드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 성주읍의 "성밖숲"을 관람하였다. 

 

 

 

 

 

먼저.....성주군이 경상북도 어디쯤에 자리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위 지도에서 처럼 성주군은 경북의 남서쪽에 위치하여 지형은 대체로 원형을 이루며 동쪽으로는 대구광역시 달성군과 칠곡군, 서쪽으로는 김천시와 경남 거창군, 남쪽으로는 고령군 및 경남 합천군, 거창군, 북쪽으로는 김천시와 칠곡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서북쪽은 낙동강 과 그 지류 하천이 형성한 평야지대로 양분되어 있고 낙동강 및 대가천 연안의 사질양토가 폭넓게 분포되어 있는 곳이다. 또한 성주군은 1개 읍(邑), 9개 면(面)으로 되어 있으며, 111개 동리가 있고, 인구는 대략 48,000여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주군은 성산가야의 옛 터전이였다고 한다.

성산가야가 신라 영토가 되면서 이곳은 본피현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고려 현종 9년인 1018년 경산부로 승격되었고

조선 태종때 성주목으로 불리어지다가 조선시대인 1895년 비로소 지금의 성주군이 되었다고 한다.

 

 

 

 

 

- 전통민속마을 "한개마을" 관람

 

위치 ; 경상북도 성주군 월향면 대산리 67번지 일원

 

한개마을은 성산이씨(星山李氏) 집성촌으로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양반촌이며, 전국에서 6번째로 지정된 전통민속마을로

조선 세종때 진주목사를 역임한 이우(李友)가 정착하여 560여 년을 옛 모습 그대로 내려오면서 살고 있는 전통 깊은 마을이다.

한개마을의 "한개"란 크다는 뜻의 "한"과 개울이라는 의미의 "개"가 합쳐진 말로 예전에는 마을앞에 나루터가 있어 대포(大浦)라고도 불리었다 전한다.

 

 

이른 아침 일행이 마을앞에 도착하니

위 사진에서 처럼 이 고장 출신인 "최상백" 해설사님이 반갑게 맞아주신다

연세가 지긋하신분으로 한개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면서 우리전통가옥인 한옥의 장점을 설명하신다

 

 

 

한개마을의 전통가옥인 초가집에 들렸다

마을의 현존하는 건축물의 대부분은 18세기 ~ 19세기 초반에 건립된 100여채의 한옥인

마을 전체가 국가지정문화재이며, 이중 75채의 가옥이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위 사진은 "진사댁 사랑채"의 모습이며, 아래사진은 진사댁 안채의 모습이다.

예전에는 한채의 가옥으로 이어졌으나 1898년 새 사랑채를 지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하며,

이곳에 살던 분중 한분이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진사댁(進士宅)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마을 구성이 풍수에 따른 전통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류주택과 서민주택의 배치로 지역적인 특성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진사댁의 별채 모습으로 해설사 설명에 의하면

한옥의 가장 큰 특징인 정지(부엌)와 온돌방의 장점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아래사진의 창살문(門)의 문양이 특이한 모습으로 불교에서 쓰는 만(卍)의 글자 모습이 이채롭다

 

 

 

한개마을의 가장 큰 특징인 흙과 돌로 담을 쌓아 옛 골목길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돌담을 끼고 이리저리 골목길을 걷노라면, 어느 고택에서 어머니나 할머니가 달려나와 반가이 맞아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더욱이 이곳의 주민들은 역사가 숨쉬고 인정이 살아있는 전통마을에 사는 사람들답게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었으니....

 

 

극와고택의 사랑채(위 사진),

이 사랑채의 상량문을 보면 조선 철종(1852년)에 건립된 가옥임을 알수 있다.

가옥의 이름을 극와고택이라고 명명한 것은 국권상실에 직면해 소복을 입고 거실에 거적을 깔고 거쳐하며 두문불출한 극와(極窩)

이주희(李澍熙)의 아호에서 따온 것이다. 극와고택은 사랑채가 초가임에도 불구하고 평면구성이 양반가옥과 같은 형태이며,

안채는 규모가 양반가옥의 주택에 필적할만한 가옥이라 할수 있다.

 

 

대산동 한주종택(大山洞 寒洲宗宅.시도민속자료  제45호)

한개마을의 가장 안쪽 산울타리에 위치한 옛집으로 "동곽댁"이라고도 한다.

영조 43년(1767)에 이민검이 처음 지었고, 고종 3년(1866)에 성리학자인 한주 이진상이 고쳐 지었다고 전한다.

 

한주정사라고 불리는 정자가 있는 부분과 안채, 사랑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정자와 안채 사이에는 협문과 일각문 등을 두어 출입하도록 하였다. 안채는 정침, 광채, 아래채, 대문채 등이 튼 ㅁ자형을 이루며 안마당을 감싸고 있다. 사랑채는 독립채로 배치되어 있다. 정자 옆에는 네모반듯한 연못을 파고 나무를 심어 정원을 꾸며 놓았다. 이 지방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는 집으로 원형이 잘 남아있고, 주위의 풍경과도 조화를 이루고 있다.(문화재청 자료에서) 

 

 

한주종택 사랑채에는 "주리세가(主理世家)"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뜻을 해석하면 "대대로 성리학자가 사는 집"이라는 뜻으로 한주 이진상(1818-1886),

그의 아들 대계 이승희(1847-1916)의 아들 삼주(三州)이기원 등 3대가 성리학을 연구하고 전수한 학문의 전당이라는 뜻

 

 

 한개마을에는 마을의 역사와 함께 내력을 이어오는 고택이 많다.

하지만 이들 고택보다도 더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끄는 것은 구불구불 이어지는 고샅길이다.

이곳 고샅길의 담장은 흙과 돌을 섞어 쌓은 죽담이다. 황토흙 사이사이에 크기, 색깔, 모양이 제각각인 자연석을 군데군데 박아놓았다. 그래서 언뜻 무질서해 보일 수도 있지만, 실은 현대적 감각으로는 감히 흉내조차 어려울 만큼 멋스럽고 자연미가 넘친다.

 

 

 

한주정사(寒洲精舍)

대산동 한주종택의 한주정사는 앞면 4칸, 옆면 3칸반 규모의 T자형 정자이며, 높은 축대 위에 지었다.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가운데 2칸은 대청이고 양쪽은 방으로 되어있다.

오른쪽 방은 뒤로 1칸 내어 통칸으로 하고, 앞으로 1칸 돌출시켜 누마루를 꾸몄다. 앞면에는 원기둥을 사용하였고, 누마루 밑의 기둥은 유난히 높아서 마루 위에서 보면 대문 안의 안마당이 내려다 보인다. 누마루 동쪽에는 네모반듯한 연못을 파고 정원을 꾸며 놓았다.

 

 

 

고택 밖에는 사진에서 처럼 아름드리 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를 들어내며

오랜세월의 풍상을 이곳을 걸쳐간 선비들을 그리워 하는양 고즈녁한 모습으로 변함없이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월곡댁(月谷宅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46호)

다소 세월의 무게감이 덜하다고 느껴지는 월곡댁은 1911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그러나 골목밖의 나무는 이집의 역사를 보아왔다는듯 느긋한 모습이다. 월곡댁의 구조도 상당히 독특한듯하다.

이 동네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하는데....익숙하지 않는 고택의 모습이 나에게는 너무나 색다르게 느껴진다.

 

 

마을의 돌담길을 찾아 보는것은 미로를 찾아가는 마음 그런것이였다.

높지 않은 담장이 모두 기와를 이고있어 반듯하게 양복을 갖춰 입은듯 점잖아 보이기까지 한다.

 

 

의암고택(依巖古宅) 

커다란 고택앞에서 갑자기 발길을 멈추게 한다.

의암고택의 의암(依巖)은 조범구(趙範九 1834~1896)선생의 호이며

선생은 당대 널리 알려진 유학자로써 그의 덕망을 기리기 위해 거처하던 이곳을 의암고택(依巖古宅)이라 부른다고 한다.

 

추운날의 고택 사랑채는 더욱 짙은 위엄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리 크지 않는 사랑채 누마루를 보니 이곳에 거처하던 주인의 소박한 성품을 읽어낼수 있을듯 하다.

다른곳의 양반 가옥은 보통 ㅁ자 형태가 많은데 이곳은 사랑채와 안채가 마치 다른 집인듯 뚜렷이 구별되어 있다.


 

 

성산 이씨의 집성촌인 한개마을은 전형적인 배산임수형 마을이다.

마을 뒤쪽에는 영취산(331m)의 산줄기가 좌청룡 우백호로 뻗어 있고, 앞쪽에는 백천이 굽이굽이 흘러내린다.

그런 지세로 인해 옛날부터 영남의 대표적인 길지(吉地) 중 하나로 꼽혔다고 한다. 이곳에 처음 정착한 사람은 조선 세종 때에 진주목사를 지낸 이우였고, 그 이후 월봉 이정현의 후손들이 모여 살면서 집성촌을 이루었다고 한다. 마을의 역사가 얼추 500년가량 이어져오는 셈이다.

 

내력 깊은 한개마을에서는 이름난 선비와 학자도 여럿 배출되었다.

조선 영조 때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호위무관으로서 평생토록 절의를 지킨 돈재 이석문, 조선 말기에 성주를 빛낸 인물 중 하나로 꼽히는 응와 이원조,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로 유명한 한주 이진상 등이 모두 이곳 출신이다. 현재 한개마을에 남아 있는 고택과 옛 건물에도 이들의 자취가 고스란히 서려 있다.

 

 

 

 

 

- 세종대왕 왕자태실(胎室) 관람

 

 

민속마을인 한개마을 관람을 마치고 칠곡군과 경계를 이루며 서진산(742m)이 솟아 있는 성주군 월향면 인촌리 태봉 정상에 자리한 세종대왕 왕자태실로 발길을 돌렸다, 이곳 태실은 국가사적 제 444호로 지정된 곳으로 세종 20년(1438년)에서 세종 24년(1442년)사이에 만들어진 19기의 태실이 유존하고 있으며 수양대군을 비롯한 세종대왕의 적서 17왕자와 비운의 왕손 단종의 태를 안장한 곳이다.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곳인데....이정표가 이렇게 초라해서야

어린학생들과 가족단위로 이곳을 많이 찾아온다는데...지자체장은 뭘하는지...

불필요한곳에 국가예산을 낭비하지 말고 부디 제대로된 이정표가 곧 세워지기를 기대해 보며...

 

 

산속 바람은 차가웠지만 차량이 가까이에 주차할수 있으니 우리일행은 쉽게 이곳을 올라갈수 있었다.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태봉에 자리한 이 태실은 전국에 산재한 많은 태실 가운데 가장 많은 태 무덤이 한자리에 모여있는 곳이다. 

 

 

사진에서 처럼 장방형으로 평평하게 다듬어진 산봉우리 꼭대기에 앞줄에 11기, 뒷줄에 8기 모두 19기의 태 무덤이 태비(胎碑)를 앞세우고 길게 두줄로 늘어서 있는 모습이다. 중 뒷줄의 첫번째에 자리잡은 수양대군의 태무덤 앞에는 귀부와 이수까지 갖춘 태비가 하나 더 세워져 있다. 훗날 임금에 올랐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이곳 태실에서도 현지 주민인 "도덕순" 해설사로 부터

자상한 설명을 듣고 있는 회원들이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진지한 모습이다

이곳 해설사로 부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의 조선인 말살정책을 들으면서 아픈역사를 다시한번 되새겼다.

 

 

젠체 19기 중 14기는 조성 당시의 모습을 유지했으나,

수양대군(세조)이 단종을 왕위에서 밀어낸뒤 이를 반대한 동생 금성대군, 한남군, 영풍군, 화의군 및 계유정란때 죽은 동생 안평대군의 태와 장태비 등은 세조 3년(1457년)에 산 아래로 파서 던져 졌으나, 1975년 흩어진 기단석을 찾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고 한다.

 

 

위 왼편 사진에 보이는 태실이 비운의 왕 단종의 태실 모습...

오른편 사진은 태실앞에 세워진 단종의 비문(각각의 태실 앞엔 사진처럼 비문이 새겨져 있다)

 

 

화강암으로 만든 19기의 태실은 조선왕조 태실의 의궤에 따랐고

지상에 석실을 만들고 그속에 분청사기로 된 태호가 들어 있고, 그 위에 기단석, 중동석, 개첨석으로 이루어져 있는 형국이다

 

참고 ; 태실(胎室)이란?

태실은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하면 그 태(胎)를 봉안하는 곳을 말한다.

예로부터 태는 태아의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라고 인정하여 태아가 출산된 뒤에도 함부로 버리지않고 소중하게 다루었다.

민간에서는 땅에 묻는 경우도 있었으나 왕족의 경우에는 국운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여겨 태를 항아리에 담아 전국의 명당에 안치시키는 방법으로 처리하였다. 이때 이를 주관하는 관상감에서 길지(吉地)로 선정된 명산(名山)에 일정한 의식과 절차를 밟아 묻었는데, 이 의식과 절차를 거쳐 완성한 시설을 태실(胎室)이라 불렀다. 또한 태봉(胎封)은 태실 가운데 그 태의 주인이 왕으로 즉위할 경우에 격에 맞는 석물을 갖추고 가봉비(加封碑)를 세운 것으로 임금의 태실을 말한다.

 

 

일행중 부부애가 남다른 두분의 모습을 담았다.

부인이 몸이 불편한데...남편이 부인 손잡아 주며 보살피는 모습에서 많은분들의 귀감이 되는듯 했다

특히 남편분은 이번 여행에 대비해서 멀리 거제도에서 생산된 막걸리를 이곳까지 가져오셔서 우리 일행에게 대접했으니...

이 자리를 빌어 다시한번 감사함을 전해 본다......"두분 오래오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세종대왕자태실 관람을 마치고 약 200m근처에 자리한 선석사로 이동하였다.

이동중에 멋진 적송(赤松)이 몇그루가 보여 사진기에 담아 보았다

 

 

 

 

 

 

 

 

- 태실(胎室)을 지키는 선석사(禪石寺) 관람

 

 

신라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사찰이 있는데,

태실이 조성된 뒤로는 태실을 지키는 절이 되었다는 선석사를 관람하였다.

 

세종대왕자태실에서 걸어서 10여분 거리에 조그마한 암자가 있었으니...

추위에도 아랑곳 없이 일행과 함께 다가가니 목탁소리와 함께 불경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온다. 

 

 

이 사찰은 처음엔 신광사(神光寺)라고 하여 신라때 의상대사가 692년(효소왕 1년)

전국에 10개의 절을 지을때 지은 사찰로서 그때는 지금의 자리가 아닌 서쪽편에 자리했다고 전한다.

 

 

태실법당이라는 현판에서 보듯 이곳 선석사는 태실과 관련이 있는듯한 사찰이다

위 건물은 2009년에 새로 지어진 건물로서 불자님들의 태를 봉안하여 기도하는 법당이기도 하다.

자모관세음보살이 자애로운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는 법당은 현판글씨와 주련이 한글로 되어 있어서 친근한 느낌이다.

 

고려 말엽 나옹대사가 1361년(고려 공민왕 10년) 신광사의 주지가 되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나옹대사가 새로 절터를 잡고 터를 닦는데 큰 바위가 나왔다 하여  터닦는 다는 뜻을 가진 ‘선(禪)’자를 넣어 선석사라 했으며

근처에 태실이 조성되면서 태실 수호사찰로 유지되었으며 영조대왕으로 부터 어필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성주군 선석사 대웅전(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13호 / 성주 선석사 영산회괘불탱 : 보물 제1608호)

앞면 3칸, 옆면 3칸, 맞배지붕의 단아한 건물로 조선시대 후기에 건축되었다.

1985년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113호로 지정되었고 같은 시대 조성한 석가여래 삼존 좌상과 후불탱이 있다.

좌대에는 사람과 용의 어울림을 아름답고 정교하게 그렸고 석가모니불 좌대는 등받침이 광배구실을 하는 특이한 형태이다.

수미단도 안에 용의 노니는 모습을 그린 후 그 위에 여러 문양으로 구멍을 내어 덧붙였다. 주련이 없다.

 

 

 

 

선석사 관람을 마치고 근처에 유명한 음식점인 "포동이 숯불가든"에서 일행과 함께 점심을 해결하였다.

약 40여명이 함께 모여서 맛있는 돼지 숯불구이와 막걸리가 곁들인 된장찌게로 맛기행을 하였으니...최고의 별미였다.

 

성주포동이숯불가든은 성주군 양돈협회에서 지역특산물인 참외씨를 먹여 키운 기능성 참외돼지 전문점으로

이곳의 생삼겹은 마블링이 우수하고, 맛이 뛰어나 한번 먹어본 사람은 다시 찾는다고 했으니.....

 

 

 


 

 

경북 성주군의 지리적 특성은 경북 서남부 산간 내륙지방으로 서쪽으로는 아름답고 수려한 가야산 (1,433m)을 중심으로 들과 야산이 형성되어 있고, 동쪽으로는 낙동강을 접하고 있어 기름진 들과 물이 풍부하며, 기상재해가 적고 공해 없는 고장으로 지하수가 풍부하며 안개 발생이 적어 일조량이 많을 뿐 아니라 미사질 토양의 토심이 깊고 배수가 잘되어 천혜의 참외 재배 적지이다

 

이고장의 특산품인 참외는 천혜의 지리적 재배 적지와 1940년대부터 축적된 참외재배 기술과 품질이 우수한 단성화 계통의 참외를 재배하여 햇빛 투과율이 좋은 성주형 하우스에서 재배한 참외로서 톱밥발효퇴비, 키토산, 한방액비, 게르마늄, 일반퇴비, 미생물, 꿀벌농법, 이온샘정수기 사용 등 친환경 농법에 의한 재배 방법으로 당도 및 신선도 유지, 형태, 빛깔 면에서 최상급 품질의 참외를 생산하고 있어 전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특산품이다.

 

이것으로 성주군 여행기 전편을 마치며, 다음편에서는 후세교육을 위해 세웠다는 "회연서원"과 아름다운 계곡인 "무흘구곡"그리고

성주읍성에 조성된 500년된 아름드리 왕버들나무의 "성밖숲"의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