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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먼나라(해외)여행

백두산 여행(4편) - 일송정, 용문교, 해란강, 용정중학교 등 관람

by 삼도갈매기 2013. 7. 14.

 

 

 

 

 

백두산 여행 4편으로 이어진다.

 

4편은 아래지도에서 보듯이 연길시에서 용정시로 이동하면서 우리의 가곡 "선구자"로 널리 알려진 일송정과 용문교

그리고 해란강, 용두레 우물 등을 관람하고, 민족시인 "윤동주"시인이 다녔다는 "용정중학교"를 관람한 이야기로 꾸며진다..

 

 

 

 

 

 

 

중국 길림성(吉林省) 용정시(龙井市)를 찾아서...  

 

연길에서 버스를 타고 30여분을 달리면 해란강이 흐르는 항일독립의 요람인 용정시에 닿을 수 있다.
이곳은 한국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특히 민족시인으로 알려진 윤동주가 중학교를 이곳에서 다녔고,

박경리의 대하소설인 토지(土地)에 나오는 배경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용정은 1백년 전에 개척되기 시작했는데, 1880년 초까지는 황량한 원시림지대로 해란강 유역에 아름다리 나무가 울창했고

갈대와 가시덤불이 그득했며 온갖 맹수가 살았다고 한다. 1883년 봄, 함경도 회령에서 넘어온 조선농민이 처음으로 해란강

유역을 개척해 마을을 일구고 옛우물자리를 찾아 우물을 만들어 이곳을 용정(龍井)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이곳 용정민속관에는 한국 교포들의 풍속, 항일의사들의 사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용정중학교는 일본통치시 항일의사들을 배양한 곳으로 교정에 있는 윤동주시인의 시비에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새겨져 있다. 이처럼 용정은 한국의 항일역사와 함께 하였기 때문에 곳곳마다 한국 선조의 숨결이 배어있는 유서깊은 곳이다.

 

 

 

백두산 여행의 마지막밤을 보냈던 연길시내 호텔(한성 세기호텔)에서 출발하여 용정시내로 이동하면서 

안내원이 잠깐 차를 멈추고 일행을 향하여 멀리 야산에 정자를 가르키며 "저곳이 유명한 일송정(一松亭)입니다"라고 말한다..

위 사진속 멀리 비암산 정상에 "일송정(一松亭)"이 아스라히 보인다.

 

 

 

일송정(一松亭)

선구자 노랫말에 나오는 일송정은 푸른 소나무인줄 알았는데 왠 정자를 가르키면서 일송정이라고 설명한다...

후에 알았지만 일송정은 정자 모양의 소나무를 뜻하는데, 일제하에 애국지사들이 밤마다 이 소나무 밑에서 비밀리에 만나

독립운동을 모의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알게된 일제는 이 소나무에 구멍을 뚫고 약품을 넣어 고사 시켰는데,

그후 1991년부터 여러차례 용정시가 한국의 도움을 받아 소나무를 다시 심고 정자를 신축하였다고 한다.

 

 

 

비암산 정상에 "일송정"과 정자주변에 새로심은 "소나무"

일송정 푸른솔은 ~ ~ 로 시작되는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바로 그 일송정이다.

아쉽게도 그 시절의 일송정은 아니지만 늘 가슴속에 그리던 곳이였으니 한편으론 안타깝기도 하다.

 

 

 

"일송정 기념비" - 기념비 오른편으로 멀리 일송정이 함께 보인다.

설명에 의하면 이곳 비암산 정상 일송정에 오르면 용정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반대편으로는 넓은 평야가 끝없이 펼쳐진

용정의 광활한 곡창지대가 펼쳐진다고 한다. 특히 이곳에서 생산된 쌀은 그 옛날 중국 황제들에게 진상될 정도로 유명했단다.

 

 

 

용문교(龍門橋)와 해란강(海蘭江)

먼 발치에서 아쉽게 일송정을 관람한후 전용버스편으로 용정시내로 진입하였다.

안내원의 설명은 계속된다..."지금 우리일행이 지나는 이 다리가 "용문교"이며, 그 아래 흐르는 강이 "해란강"입니다"...

눈 깜작할 사이에 용문교를 지나니, 잠시 차를 세워서 기념사진만 한장 찍자고 해도 그냥 지나쳤으니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용두레 우물

용두레 우물은 1839년 ~ 1880년 사이에 조선에서 이민온 장인석과 박인덕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우물은 일찍이 여진족이 쓰던 우물로 한족과 조선족들이 우물이 깊고 오가는 길손들이 두레박을 빌리는 일이 잦아 두례박

즉, 용두레를 해놓아 그때부터 용두레 우물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고장 이름도 용두레촌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사실 오늘날 연길이 중국 조선족의 행정과 소비의 중심이 되었지만 조선족의 뿌리가 자라기 시작한 곳은 이곳 용정이라고 한다,

 

 

참고 ; 연변의 해란강은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겨레의 성산-장백산 기슭에서 발원하여 청산리계곡과 화룡분지, 평강벌을

감돌아서 용정시를 안은 풍요로운 땅에 흘러든다. 강 길이는 145Km로서 연변조선족자치주 인구 반수가 이 강안에 살고있다.

우리 조상들이 이 고장을 찾아와 용두레 우물을 파고 벼농사를 짓기 시작한것은 19세기 후반기부터였다.
가난한 농민과 애국지사들이 이곳에 모여 새 학당을 꾸리고 민족계몽과 반일 기치를 높이 들고 일어나게 되자
용정은 일약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부상하였다. 1920년 10월에 있은 청산리전투도 바로 이곳 해란강 상류의 백운평 마을에서

벌어졌다고 한다. 이곳을 배경으로 우리의 가곡 "선구자(先驅者)" 노래가 만들어졌다고 한다(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 
 

1.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2.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소리 들릴 때, 뜻 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이역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3.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길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이 글을 쓰면서 용정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고

                      일송정, 해란강, 용문교, 용두레 우물, 비암산도 알게 되었다. 
           내 자신이 당시로 돌아가 조국을 찾겠노라고 외치는 애국지사가 되어보는 마음이다.

                             흐르는 가곡 "선구자"는 가곡중의 가곡으로
              어느 음악회든지 몇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불려지는 불멸의 곡이니.
                   우리 다함께 경건한 마음으로 힘차게 따라서 불러 봅시다....

                                                감사합니다....... ^*^

 


- 용정중학교(구 대성중학교) 방문

 

용정시내에서 일송정과 용문교 그리고 해란강, 용두레 우물을 안타깝게 스치듯 구경하고 근처에 있는 용정중학교를 방문하였다.

이곳 용정중학교(구 대성중학교)는 민족시인 윤동주 시인이 다니셨던 학교로 현재는 용정제일중학교로 학교명이 바뀌어 있었다.  

 

 

 

용정중학교 교문에 들어서서 오른쪽에 구건물이 보이고 그 건물앞에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세워져 있음을 알수 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공부했던 용정중학은 일제강점기 시절 항일운동의 중심지였던 연변자치주 용정(룽징)에 위치한 학교다.

항일 민족시인 윤동주의 모교인 용정중학은 1946년 광명중학교, 은진중학교, 대성중학교 등 용정지역의 6개 학교가 통페합하여

옛 대성중학교 터에 세워진 조선학교로 윤동주 시인은 용정중학교의 전신인 광명중학교에서 공부하였다. (현재의 용정중학교는

옛날 대성중학교가 있던 자리라고 한다)

 

 

 

윤동주 시인의 대표시 "서시(序詩)" 시비(詩碑) 앞에서....

 

       序 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 11. 20.

 

 

이번 여행에 함께 동행했던 임대장님 부부와 함께....

사실은 임대장을 알게된 것은 몇년전인데, 그의 부인이 성악을 하셨다고 했으니

이번 여행에서 가곡 "선구자"를 반주없이 소프라노 음성으로 모두에게 들려주셨으니 이자리를 빌어 감사를 드리고 싶다...

 

 

 

용정중학교 구관 건물 오른쪽에 이상설선생의역사전람관이 세워져 있다.

보재 이상설(李相卨,1870 ~ 1917) 선생은 고종의 밀지(密紙)를 가지고

만국평화회의 헤이그 밀사로 이준, 이위종과 함께 했던 독립운동가이다. 

 

 

 

 

용정중학교 구관 2층 역사전시관으로 입장하였다.

건물 2층에 있는 역사전시관에는 윤동주 시인의 사진과 화보, 책자를 비롯하여

1900년대 초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항일운동을 펼친 인물 등의 사진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관에는 안내원(해설가)이 상주하여 단체 방문시 전시관과 용정중학교, 윤동주 시인 등 용정시와 관련된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 등의 설명을 들을 수 있으며, 입장료는 무료이나 용정중학교 전시관 관람 후 기부금의 명목으로 방문객이 원하는 만큼

기부를 하고 방명록을 남기고 그 돈은 이곳 학교에서 어렵게 공부하는 학생들에 장학금으로 쓰인다고 한다.

물론 나도 이곳 역사관 방명록에 이름을 남기고, 소액이지만 학생들의 장학금에 보탬이 되도록 일조하였다.

 

 

 

 

 

 

 

 

 

윤동주 시인 연보

1917년(1세) : 12월 30일 중화민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 부친 윤영석, 모친 김용(金龍, 1891~1948)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나다.

                      (본관 : 파평. 아명 : 해환(海煥).

                      윤동주의 호적을 비롯한 각종 공식기록에 그의 출생이 1918년으로 되어 있는 것은 출생신고가 1년 늦었기 때문이다.
1925년(9세) : 4월 4일, 명동소학교 입학.
1928년(12세) : 서울에서 간행되던 어린이 잡지 『아이생활』을 정기구독 시작. 급우들과 『새명동』이란 등사판 잡지를 만듬.
1931년(15세) : 3월 20일, 명동 소학교 졸업. 명동에서 10리 남쪽에 있는 대랍자의 중국인 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간 수학.
                       이 해 늦가을 용정으로 이사.
1932년(16세) : 4월, 용정 미션계 교육기관인 은진(恩眞)중학교에 송몽규, 문익환과 함께 입학. 인쇄소 차렸으나 사업이 부진하다.
1934년(18세) : 12월 24일, 최초의 작품인 시 3편(초한대, 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을 제작 기일 명기하여 보관 시작.
1935년(19세) : 9월 1일, 은진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친 다음 평양숭실중학교로 전학(편입시험 실패로 3학년 편입)

                       10월, 숭실중학교 학생회 간행의 학우지 『숭실활천』 제 15호에 시 「공상」 게재, 최초로 작품 활자화되다.
1936년(20세) : 3월, 숭실중학교에 대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항의표시로 자퇴. 문익환과 함께 용정으로 돌아오다.

                       (윤동주는 용정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문익환은 5학년에 편입.)
1937년(21세) : 8월, 백석 시집 『사슴』을 배껴 필사본을 만들어 가지다. 이 무렵 광명중학교 농구선수로 활약.
                       상급학교 진학문제를 놓고 부친과 심하게 대립, 결국 조부의 개입으로 본인이 원하는 <연전 문과>로 진학 결정.
1938년(22세) : 2월 17일, 광명중학교 5학년 졸업. 4월 9일, 서울 연전 문과 입학.

                       연전 기숙사 3층 지붕 밑 방에서 송몽규, 강처중과 함께 3인이 한방을 쓰면서 연전생활 시작
1939년(23세) : 기숙사를 나와서 북아현동, 서소문 등지에서 하숙생활. 북아현동에서 살 때, 라사행과 함께 정지용을 방문,

                     『조선일보』 학생란에 산문 「달을 쏘다」, 시「유언」,「아우의 인상화」를 尹東柱 및 윤주(尹柱)란 이름으로 발표. 

                      동시 「산울림」을 『少年』에 윤동주(尹童柱)란 이름으로 발표.

1940년(24세) : 다시 기숙사로 돌아오다. 하동 출신 정병욱(1922~1982)과 깊이 사귀다.

                       1939년 9월 이후 절필하다가 이해 12월에 가서 3편의 시(八福, 慰勞, 病院)을 씀.
1941년(25세) : 5월에 정병욱과 함께 기숙사를 나와 종로구 누상동 소설가 김송 씨 집에서 하숙. 9월 북아현동으로 하숙집 옮김.
                       12월 27일, 전시 학제 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연전 4년을 졸업하다.

                       (졸업기념으로 19편의 시를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란 제목의 시집을 내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음)

1942년(26세) : 연전 졸업 후 한달 반 정도 고향집에 머무르다. 부친이 일본 유학을 권한다.

                       도일수속을 위해 1월 19일에 연전에 <平沼東柱>라고 창씨한 이름을 계출하다.

                       1월 24일에 쓴 시 「懺悔錄」이 고국에서 마지막 작품이 되다.
                       4월 2일, 동경 입교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 10월 1일, 경도 동지사대학 영문학과에 전입학.
1943년(27세) : 7월 10일, 송몽규 특고경찰에 의해 경도 하압경찰서에 독립운동혐의로 검거되다.
                       7월 14일, 윤동주, 고희욱도 검거되다. 12월 6일, 송몽규, 윤동주, 고희욱 검찰국에 송국되다.
1944년(28세) : 1월 19일, 고희욱은 기소유예로 석방되다. 2월 22일, 윤동주 · 송몽규 기소되다.
                       3월 31일, 경도지방재판소 제2형사부는 윤동주에게 <징역2년(미결구류일수 120일 산입)>을 선고

                       (확정: 1944년 4월 1일, 출감예정일 1945년 11월 30일).
                       이들은 판결 확정 뒤에 복강형무소로 이송되어 복역 시작. 매달 일어로 쓴 엽서 한 장씩만 허락되다.

1945(29세) :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윤동주, 복강형무소 안에서 외마디 비명을 높이 지르고 운명.
                    2월 18일,북간도 고향집에 사망통지 도착,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시신을 가져오려고 도일, 복강 형무소에 도착

                    하여 먼저 송몽규를 면회.(자신들이 이름 모를 주사를 강제로 맞고 있으며 동주가 그래서 죽었다는 증언을 듣다.)
                    3월 6일, 북간도 용정동산의 중앙교회 묘지에 윤동주 유해 안장.
                  

1990년 : 광복절에 대한민국 정부는 윤동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4월 5일에 북간도의 유지들이 명동 장재촌에 있던 송몽규의 묘를 용정 윤동주 묘소 근처로 이장.
1995년 : 광복절에 대한민국 정부는 송몽규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애국장은 독립장보다 한 등급 아래 훈장이다.)
1998년 : 8월에는 윤동주의 작품을 모두 수록한 사진판 시집이 민음사 판으로 나왔다.

             현재 윤동주의 시집은 여러 나라에서 여러 판본으로 번역되었고, 그의 전기를 비롯한 연구서적도 수십권에 이르고,

             박사학위 논문을 비롯한 학술논문들은 3백 편을 상회한다.

 

 

 

이상설 ;  독립운동 펼친 우리나라 독립운동가(1870~1917).

자는 (), 부재(). 을사조약 체결되자 조병() 등과 협의, 조약 무효 상소하고 자결 기도하였으나 실패 그쳤다. 고종 밀지() 받아 이준(), 이위종() 함께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 특사 참석하려 하였으나 일본 계략으로 참석할 자격 얻지 못하였다..

 

 

 

이곳 전시관엔 윤동주 시인 외에도 문익환 목사, 정일권 전총리 등

이학교 출신 인사의 학창 시절과 활약상이 여러면에 걸쳐 화보, 사진, 책자로 전시되어 있음을 볼수 있었다.

 

 

 

건물 1층 윤동주 시인이 공부했던 교실을 재현해 놓았다...(윤동주 교실에서)

아내 뒤로 보이는 흰색석고는 윤동주 시인의 흉상인듯.

 

 

 

용정중학교 신관(사진 위)과 오늘 일행이 방문했던 구관(사진 아래)전경

현재는 용정제일중학교로 교명이 바뀌었으며, 실제로 학생들이 이곳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참고 ; 중국의 학제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6-3-3-4제도라 한다. 소학교와 초중학교(중학교를 초중학교라 함)는

의무교육이고, 고등학교(고중학교라 함)는 자비로 다녀야 하며, 대학은 국비지원이 있다고 한다.

 

 



(지금 흐르는 "선구자"노래를 멈추고, 위 동영상을 보시기 바랍니다)

 

 

 

 

용정시내를 벋어나 중국과 북한의 접경지역인 "도문(圖們)"으로 이동중이다.

 

위 사진은 백두산 여행 1편에서 올랐던 "모아산(517m)"으로 현재 건설중인 기상관측탑과 함께 용정시내 한가운데 우뚝 솟아있다.

모아산은 연길시와 용정시의 경계지역 넓은 평야에 우뚝솟은 산으로 정상에 서면 도시와 함께 넓은 평야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특히 현재 공사중인 기상관측용 레이다 탑은 높이 180m로 건설되고 있으며, 지상 32층 건물과 동일하게 건설중이였다.

 

연길주변엔 산이라곤 없어 이곳 모아산 정상은 새해 해돋이 관광명소로 연길시민들이 즐겨 찾는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모아산 정상 전망대에 서니 사방팔방 모두가 푸른 들판밖에 보이지 않았으니. 북쪽으로는 연길 하곡평지가 남쪽 산등성이

아래로는 충적평원이 펼쳐져 있는데 용정쪽 서전이벌 위로 해란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음을 알수 있다.

 

다음편은 백두산 여행 마지막편으로 "도문(圖們)"에 도착 두만강 푸른물에 뗏목을 타고 북한땅을 가까이에서 보았던 이야기와

연길시내에 북한동포가 운영하는 "류경호텔"에서 평양냉면과 북한처녀들의 춤과 노래에 취한 이야기 등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