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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이야기/미디어 이슈

1972년 대한민국 10대 뉴스

by 삼도갈매기 2013. 7. 21.

 

 

 

 

1972년 국내 10대 뉴

 

 
박정희 대통령, '경제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 발동

박정희 대통령이 1972년 8월 3일 자정을 기해 헌법 73조에 의한 긴급재정명령(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 이른바 '8·3경제조치' 8개항을 발동했다. 긴급명령은 다음과 같다. 1. 모든 기업은 2일 현재 보유하고 있는 모든 사채(私債)를 정부에 신고해야 하며 사채는 3일자로 월리 1.35% 3년거치 5년분할 상환의 새로운 채권채무 관계로 조정되거나 또는 출자로 전환되어야 한다. 2. 금융기관은 2천억원의 특별금융채권을 발행, 이 자금으로 기업의 단기고리대출금의 일부를 연리 8% 3년거치 5년 상환의 장기저리 대출금으로 대환(貸煥)한다 3. 일체의 어음교환을 금지한다 등의 내용이다. 이 긴급명령은 박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수개월전부터 관련 장관들이 검토, 시안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조처는 한마디로 기업을 사채를 포함한 채무의 중압에서 해방시킴으로써 기업재무구조를 건전히 해 궁극적으로 경제의 안정성을 돕자는 혁명적인 조처로 평가됐다.

서울 시민회관 화재

1972년 12월 2일 저녁 8시 27분경 서울시민회관에 전기 합선으로 불이나 52명이 소사했거나 질식사했고 76명이 부상했다. 불은 연건평 3천4백32평(지하1층, 지상10층) 중 소강당을 제외한 3천여평을 모두 태워 2억5천만원에 달하는 재산피해를 내고 2시간만에 진화됐다. 이날 화재는 오후 6시부터 문화방송국 개국 11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10대 가수들이 청백전을 끝내고 마무리하던 중 무대 뒤쪽에서 일기 시작했다. 불길이 치솟자 시민회관을 빠져나오려는 관객들이 계단으로 한꺼번에 몰려들어 어린이와 여자들이 이들에 깔려 피해가 더욱 컸다. 화인은 조명장치의 과열에 따른 전기합선으로 밝혀졌다.

군납(軍納) 부정선

육군 보안사령부는 1972년 6월 1일 군납 부정사건과 관련, 국방부 조달본부 제1국장 김용찬 준장과 전 제1국장 하중원 준장 등 장성 2명과 구매1과장 김흥만 대령, 전 구매1과장 조병모 대령, 구매장교 박성환 중령 등 6명을 수뢰와 특정범죄가중처벌법 등 위반혐의로 구속,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또 군납부정과 관련, 23개 민간업체 직원 34명을 뇌물공여 혐의로 서울지검에 넘기고 죄질이 가벼운 하급장교 30여명은 경고조치했다. 김 준장 등은 69년말부터 약3년 동안 군작업복, 천막, 내의, 드럼통, 농구화 등 26개 품목을 군납하는 과정에서 불량품을 눈감아 주거나 납품가격을 시가보다 높여주는 조건으로 1억6천여만원을 받았다. 한편 육군보통군법회의는 6월 29일 선고공판을 열고, 한 준장에게 사형, 김 준장에게 무기징역, 김 대령 등 2명에게 징역 15년, 조 대령 등 2명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시스타호(號) 화재와 파크로버소(號) 침몰

한국 제2의 유조선 시스타호(12만3백t)가 1972년 12월 19일 페르시아만 부근 오만해역에서 브라질 유조선 호르타 바르보사호(號)에 선미 왼쪽부분을 들이 받혀 옆에 있던 연료통이 폭발, 타고있던 선원 42명중 11명이 실종되고 선장 등 나머지 31명은 구조됐다. 시스타호는 이날 사우디아라비아 파스타루라항에서 원유 11만5백t을 싣고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로로 가는 중이었고 가해 선박은 원유를 싣기 위해 페르시아만으로 들어가던 중이었다. 시스타호는 예인도중 침몰했다. 또 승무원 33명 전원이 한국인으로 구성된 리베리아 선적 화물선 파크로버호(1만2천7백t)가 12월 24일 미국 알래스카주 코디악항 남쪽 1천1백20km해상에서 풍랑을 만나 침몰하고 선원 전원이 실종됐다.

7·4남북공동성명 발표

남북한의 긴장완화를 위한 7·4 남북공동성명이 1972년 7월 4일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 발표됐다. 미국과 중국의 국교정상화를 계기로 종래의 대미의존적인 안보정책에서 탈피하고자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모색한 결과였다. 성명이 나오기까지 서울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평양의 김영주 조직지도부장이 각기 상대방을 방문(서울방문시에는 박성철 제2부수상이 대신 방문)해 회담을 진행했다. 그 내용은 1.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주적 해결 2. 돌발적 군사사고 방지, 상호간의 신속한 업무처리를 위한 서울과 평양간의 상설 직통전화 가설 3. 남북적십자회담에 대한 적극 협조 4.상대방에 대한 중상비방, 무장도발 포기 5. 남북간 다방면의 교류 6. 남북조절위원회 구성 등이다.

제1차 남북적십자회담 평양서 개막

1972년 8월 30일 제1차 남북적십자회담이 평양 대동강 문화회관에서 열렸다. 이산가족을 찾기 위한 남북간의 적십자회담은 1971년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 총재 최두선이 제의하고 북한적십자사가 이를 수락함으로써 성립됐다. 1차 예비회담이 열린 9월 20일부터 72년 7월까지 양측은 23차례의 예비회담을 통해 본회담의 장소, 일시, 의제, 절차 등에 합의한 결과 마침내 이날 역사적인 남북적십자 본회담을 열게 됐다. 1973년 7월 13일 평양에서 개최된 제7차 본회담을 끝으로 회담은 별 성과 없이 교착상태에 빠져있다가 12년만인 1985년 제8차 본회담을 서울에서 열고 남북한 이산가족 등의 교환방문 추진에 합의했다. 그리고 9월 20일 고향방문단 50명, 예술공연단 50명, 취재기자 30명 등 151명이 각각 서울과 평양에 도착해 남북 분단이래 공식적인 이산가족 상봉과 예술공연단의 공연이 이뤄졌다.

박정희 대통령 '10월 유신' 선포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이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이른바 '10월 유신'을 선포한 것이다. 이후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 국회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 중지, 비상국무회의 설치 등의 비상조치를 취한 후 자신의 영구집권을 보장하는 후속 조치들을 속속 단행했다. 10월 27일에는 '조국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헌법개정안'을 공고했고, 11월 21일에는 반대 발언이 완전히 봉쇄된 가운데 국민투표를 치러 투표율 91.9%에 91.5% 찬성으로 개헌안을 확정시켰다. 박 대통령은 12월 23일 확정된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선거에 단독 출마, 제8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유신체제를 출범시켰다. 박 대통령이 비상수단으로 체제개편을 단행한 것은 3선개헌에 이어 또다시 개헌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 71년 대통령선거에서 고전했다는 점, 남북대회 재개로 명분이 생겼다는 점 등 제반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신라 금관 발견

삼국시대 초기의 것으로 한국 最古로 추정되는 신라 금관이 경주에서 발견됐다. 이 금관은 69년 3월 최종호씨가 그가 세 들어 있던 경주시 교동 집 옆 적성총에서 파내 3년여를 숨겨 오던 것을 문화재관리국이 6백57점의 부장품과 함께 회수한 것이다. 높이 13cm, 관대직경 14cm 외관으로 종이장같이 얇은 금관으로, 이마위에 얹혀지는 밑둘레에 단지형입식을 달았고 관대는 금판을 오려 붙여 띠처럼 만들었으며 뒤에 구멍을 뚫어 매어 쓸 수 있게 했다. 작고 간결한 양식이 특징이다. 이번 금관은 우리나라 것으로는 여섯 번째로 발견된 것이다. 1921년에 발굴된 금관총 금관, 24년에 금령총 금관, 26년 서봉총 금관, 이병철씨 소유의 금관, 일본 오쿠라씨가 소장하고있는 금관에 이어 해방 후 처음 발견된 신라의 금관이다.

박정희 대통령, 첫 통일주체국민회의 대통령 선거로 당선

박정희 대통령이 1972년 12월 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실시한 대통령선거에서 임기 6년의 제8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2천3백59명 대의원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유신헌법과 국민회의법 규정에 따라 토론없이 무기명 방식으로 투표해 찬성 2천3백57표 무효 2표의 압도적 지지로 박정희 대통령을 선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24일 당선소감에서 "국력배양을 가속화하며 안정과 번영 그리고 평화의 기틀을 더욱 공고히 다져나가 민족의 염원인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발표하고 결의문을 채택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2월 27일 대통령에 취임했다. 한편 이날 실시된 대통령선거는 72년 11월 21일 국민투표로 확정된 유신헌법에 따라 치러졌다.

전국에 물난리

1972년 8월 18일부터 19일까지 이틀동안 서울지방에 4백61.8mm, 강원도와 충북지방에 2백69.6-3백39mm의 집중폭우가 쏟아져 5백7명이 사망하고 1백32명이 실종됐으며, 6백90명이 부상하는 등 모두 1천3백92명이 희생됐다. 또 59만 1천2백43명의 이재민이 났으며 2백69억7천9백여만원에 상당하는 재산을 잃었다. 폭우로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부선, 경인선, 호남선, 중앙선, 태백선 등 대부분의 철도가 침수 또는 산사태로 교통이 두절되고 곳곳의 고속도로와 일반 국도의 차량통행이 마비됐다. 수마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인 9월 13일 다시 영남 동해안에 집중호우가 내려 1백54명이 죽고 18명이 실종됐으며 78명이 부상하는 등 2백48명이 희생됐다. 또 2만4천2백명이 이재민이 되고 18억7천2백만원에 달하는 재산을 잃었다. 강우량은 부산이 2백27.7mm로 가장 많았고 월성이 1백99mm, 영일이 1백56mm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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