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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동해 해파랑길

동해 해파랑길 제 13차 구간(포항 흥환리 ~ 송도해수욕장)

by 삼도갈매기 2014. 1. 5.

 

 

 

 

 

 

2014년 1월 4일(토요일), 새해 첫 인도행 도보다.

내일이 "소한"이라는 절기인데, 지구 온난화 영향인지 오늘은 봄 날씨 처럼 포근하다.

 

인도행회원 30여명이 동해 해파랑길을 걷기위해 오전 08시 부산을 출발, 2시간 소요되어

경북 포항시 동해면 흥환리(흥환보건소)에 도착하여 포항방면 마지막 해파랑길(13차 도보)을 걸었다.

 

 

 

 

위 포항지도에서 보듯이 포항시 동해면 흥환리 흥환보건소(시작지점 - 붉은 화살표)를 출발하여

진불사 입구 - 동산공원묘원 - 월성손씨묘지 - 도구해변(영일만횟집)까지 대략 3시간을 걸었고,

파란색 화살표인 도구해변에서 - 형산강 대교 입구까지 전용차량으로 이동한 후, 붉은 화살표인

형산교 입구 - 형산교 - 포항시 북구 해도동 형산강변길을 따라 송도해변까지 1시간을 걸었다.

(총 24Km거리중 13.5Km거리를 걸었으며, 중식시간 등을 포함하여 6시간 소요됨)

 

 

 

 

포항시 동해면 흥환리 흥환보건소를 지나

흥환 2리 마을회관 입구에서 간단한 주의사항과 인원점검을 마치고 출발.

 

 

 

내일이 춥다는 "소한(小寒)"절기인데....

바람한점 없이 이른 봄 날씨만큼 포근하다...

길잡이 백일봉님 설명에 의하면 "복 받은 날씨"라고 말씀하신다..

 

 

 

 

 

호미기맥 능선 중간쯤에 세워진 이정표

동해면 흥환리에서 출발하였으니 3.1Km쯤 걸은듯...상정리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나지막한 산 봉우리에 "동산공원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목도 축이고 과일로 배도 채운다.

 

 

 

위 사진처럼 멀리 동해 바다가 아스라히 보인다.

기상청 일기예보에 의하면 경북지방에 눈이 내린다고 했는데...

오전 현재 포항지방은 바람한점 없이 맑은 날씨를 보인다..

 

 

 

"월성손(孫)씨묘지" 라는 표지석이 세워진 삼거리에 도착하였다..

동해 해파랑길을 혼자서 사전 답사하신 백일봉님께서 대동여지도를 만드신

김정호 선생의 노고가 얼마나 크셨는가를 이제사 알것 같다고 말씀하시면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울창한 소나무 숲과 얏트막한 산길을 벋어나니

동해면사무소가 있는 "도구해변"이 보이기 시작한다...

(영일만회식당 입구에 일행의 전용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포항시 남구 동해면 도구2리에 있는 "동해장 식당"에 도착하여

돌장어탕, 청국장, 된장찌게를 메뉴로 일행들 기호에 따라 중식을 해결하였다..

 

해파랑길 길잡이 백일봉님이 새해맞이 첫 도보를 기념해서 "귀 밝이 술"을 준비하시고

인도행 부산방과 동해 해파랑길을 위하여 건배 제의까지 하셨으니....다시한번 그분께 감사를 드린다.

 

 

 

식사후 식당 입간판 앞에서 단체사진을 담는다.

회원들이 이구동성으로 동해장 식당의 음식맛과 주인장의 친절함에 칭찬을 하니 사장님 명함을 함께 담았다..

본 식당은 동해면사무소의 추천에 의해서 30명의 회원들이 식사를 했으니, 주인장이 본 단체사진을 카톡으로 보내달라고 했는데..

(제가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는걸 하지 못하는데.....)

 

 

 

식사후 차량으로 이동하여 근처의 "포스코 역사관"을 방문하였다.

3층으로 만들어졌으며...연면적 3,636㎡, 전시면적 1,983㎡로 조성되어있었다.

 

 

 

 

 

외부 에스켈레이트를 타고 2층에 오르면 안내 데스크에서 일행을 반긴다.

포항제철과 관련된 동영상을 관람하고, 박물관 전시물을 안내자의 설명과 함께 관람할수 있었다.

 

 

 

"철제솥" 앞에서...

조선시대 궁중에서 사용되던 솥으로 높이 1.3m, 지름 1.2m 크기의 대형솥..

원형의 벽면엔 포항제철의 역사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2층 전시관에는 "기슬관, 창의관, 청암관, 영상관 등으로 꾸며져 있었으며

1972년 창업에서 부터 포항제철 건설기 그리고 광양제철 건설기와 대역사 완성이후 등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벽면 한쪽을 장식하고 있는 "박정희와 박태준"

 

- 박정희와 박태준 

나라의 명운을 가른 만남(중앙일보 정진홍 논설위원 2011.12.17)

박태준과 박정희의 만남은 대한민국의 홍복(洪福)이었다. 그 만남은 대한민국을 희망 없는 음지에서 활기 넘치는 양지로 이끈 결정적 계기였다. 1948년 조선경비사관학교 6기생으로 들어가 육사 6기가 된 박태준 생도는 생도대 제1중대장 겸 교관이었던 박정희 대위와 처음 만났다. 어느 날 교관 박정희는 미분과 삼각함수 등을 제대로 이해해야만 풀 수 있는 탄도궤적 측정의 문제를 강의실 칠판에 적었다. 모두가 난감해 할 때 그 문제를 풀어낸 이가 다름아닌 박태준 생도였다. 그 일로 박태준이란 이름 석자는 젊은 박정희에게 각인됐다. 정말이지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그 후 박정희는 48년 여순반란사건 이후 전개된 숙군(肅軍) 과정에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다 살아 남았고, 포천 1연대 중대장이었던 박태준은 6·25 전쟁의 최전선에서 끝내 생환했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57 10월이었다. 1군 참모장이었던 박정희가 박태준을 1군 산하 25사단 참모장으로 부른 것이다. 그 후 박정희 소장이 60 2월 부산군수기지 사령관이 된 후 박태준 대령 역시 사령부 인사참모로 부임했다. 하지만 이듬해 5·16이 감행됐을 때 거사명단에는 박태준의 이름이 빠져 있었다. 거사 이틀 뒤 박정희는 박태준을 불러 혁명거사 명단에서 그를 뺀 이유를 밝혔다. “하나는 거사가 실패하더라도 살아남아 군을 이끌 지도자가 필요했고 다른 하나는 내 처자의 뒷일을 부탁하려 했기 때문이라네!” 결국 거사가 성공한 후 박태준은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의 비서실장이 됐다.

 

박태준이 아내 장옥자여사로부터 받은 신혼 첫 선물은 반지도 시계도 아니었다. 『경제학 원론』이었다. 하지만 그는 가정살림경제엔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64년 새해 첫날 박태준은 박정희의 저녁 초대를 받았다. 그는 육영수 여사가 손수 따라주는 따끈한 정종을 마시며 이제 곧 미국 유학 길에 오른다는 것을 알려 드렸다. 하지만 박정희는 그를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한 대일특사로 파견할 뜻을 밝힌 후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자네 여태 집도 없더구먼. 집이나 장만하게.” 첫딸을 낳은 후 열다섯 번씩이나 셋방살이를 전전하던 박태준은 박정희의 금일봉과 셋방 전세금을 합쳐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에 처음으로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64 10월 박정희는 다시 박태준을 불렀다. 그리고 그에게 대한중석을 맡아 달라고 했다. 텅스텐을 캐내 해외에 수출하던 대한중석은 60년대 초반 당시 연간 국가 총수출액 약 3000만 달러 중 500~600만 달러를 점유할 만큼 막중한 기업이었다. 박정희는 박태준을 대한중석에서 시험해보고 종합제철소 건설의 임무를 맡길 요량이었다. 65 6월 박태준은 다시 박정희와 독대했다. 박정희가 입을 떼었다. “제철소 건설을 맡아주게. 아무리 둘러봐도 이 일을 맡길 사람은 임자밖에 없어. 나는 고속도로를 직접 감독할거야. 자넨 제철소를 맡아!” 국토의 대동맥을 잇는 일은 대통령이 맡고, 산업의 쌀인 철을 만드는 일은 박태준의 손에 달렸던 것이다.

 

69 7월 박태준은 박정희의 3선개헌 지지서명서에 사인하지 않았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등 대통령 주변은 분개했다. 하지만 박정희는 달랐다. “그 친구 원래 그래. 제철소 일 열심히 하게 건드리지 마.” 3선 개헌이 관철되고 난 다음인 70 2월 박정희는 박태준에게 설비구매와 관련된 애로사항을 건의토록 한 후 그 서류에 곧장 사인해서 되돌려 줬다. 전권을 위임한 이른바종이마패였다. 그러나 박태준은 이것을 한 번도 세상에 내밀지 않았다. 그것은 박정희 사후에 공개됐을 뿐이다. 둘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단적으로 웅변해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이 두 사나이의 만남이 대한민국을 살렸다. 한 사람은 오래 전에 고인이 됐고, 이제 남은 한 사람마저 우리는 떠나 보낸다. 이 흔들리는 시절에애국심 갖고 일해 달라는 그의 마지막 유언이 귓전을 때린다.

 

 

 

 1970년 4월1일 역사적인 포항제철1기 설비공사가 시작될 당시의 조형물.

좌로부터 창업자 박태준, 당시 대통령인 박정희, 오른쪽분은 당시 상공부장관이 아닐까? 

 

 

 

 

포항제철 제 1고로를 형상화 한 모형

내부로 들어가면 동영상을 관람할수 있으며,

실제 벽면은 용광로속에서 타지않는 타일이 박혀있다.

 

 

 

 

 

벽면 한켠에 자리한 "포스코의 얼굴"이란 조형물

포스코인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사진에 담아 만들었다(아래사진 참조)

 

대략 40여분간 관람을 마치고 "포스코 역사관"을 나왔다.

 

 

 

 

 

역사관 앞에서 인증샷을 담는다.

오전엔 봄 날씨처럼 맑았는데, 중식 후 바람도 불고 추워지기 시작한다..

(위 아래사진 백일봉님 카페에서 옮김)

 

 

 

 

 

포스코 역사관에서 차량을 이용하여

포항시 남구 해도동에 자리한 형산교(橋) 앞에 도착하여 오후 도보를 시작하였다.

 

 

 

450m 거리의 형산교를 건넌다

형산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바닷 바람답게 춥고 매섭다...

 

 

 

형산교에서 바라다본 형산강

사진속 멀리 동해 바다와 바로 연결되어 있다.

 

 

 

형산교(橋) 위에서 바라다본 포항제철 전경

 

주식회사 포스코(POSCO)는 철강 회사이며, 본사는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괴동동에, 광양제철소는 전라남도 광양시 금호동에, 서울사무소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대치동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포스코는 포항시와 광양시에 2곳의 일관 제철소가 있으며, 일본오사카부의 물류센터와 미국 캘리포니아 주 피츠버그 시에 US철강1986년 4월 1일 합작 법인으로 설립한 냉연 단순압연 법인인 UPI(USS-POSCO Industries)가 있다. 이 밖에도 중국 강소성 장가항에 중국 사강그룹(沙钢集团)과 합작으로 1997 ~ 2006년, 3단계로 완공한 스테인리스 스틸 일관 제철소인 장가항포항불수강(張家港浦項不銹鋼有限公司) 등이 있다.(위키백과에서)

 

 

 

형산교를 건너서 "송도 해수욕장" 방향으로 걷는다...

 

 

포항운하관 앞에서....

사진속 왼편으로 작은 운하가 연결되어 있어 소형선박이 드나들수 있다.

길 왼편쪽에 죽도시장과 포항고속터미널이 자리하고 있다.

 

 

 

오늘 도보의 종착지인 "송도해수욕장"에 도착하였다.

포항송도해변은 예로부터 은빛 모래와 주위의 우거진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자연조건이 좋은 이름난

해변이었지만, 공단 설립과 일부 백사장 유실로 지금은 폭 10~40m의 사장 1,700m 정도이다. 도심권에 위치하여

이용이 편리하며, 음악회 등 행사를 진행하기도 한다. 1983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고, 해수욕은 할 수 없으며 산책 장소로 이용 할 수 있다.

 

바람이 심하게 불고 있으니 페어그라이딩을 이용하여 물 위에서 스키를 타듯 멋진 묘기를 연출한다.

 

 

 

 

위 사진에서 처럼 송도해수욕장에서 우측을 바라보면 포항제철의 모습이고

좌측을 바라 보면 아래사진에서 처럼 포항 북구쪽 모습으로 죽도시장, 울릉도 여객선터미널이 보인다. 

 

 

 

 

 

포항 송도해수욕장 중앙에 세워진 여신상

두팔을 높이 쳐들고 있는 형상인데 무엇을 뜻하는지 알수가 없다...

 

 


 

오전엔 봄 날씨 처럼 바람한점 없더니 오후에 바닷가에 와서 그런지 바람도 심하게 불고 곧 비(雨)라도 내릴 기세다. 

마지막으로 단체사진을 담고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는 전용버스에 올라 부산으로 내려오는데 차창밖으로 비가 내린다..

부산에서 좀처럼 볼수 없는 눈(雪)이라도 내렸더라면 했지만...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으니 비가 내리는게 다행이였다.

 

2013년 봄 부터 매월 두차례식 걸었던 동해 해파랑길 걷기를 오늘 제 13차 도보로 제 1단계 구간을 마치셨단다.

2014년 3월부터 제 2단계 시작지점인 울진구간에서 다시 만날것을 약속하고 일행과 헤어져 오늘 하루 일정을 마쳤다.

 

추신 ; 2013년 5월 ~ 10월까지 해파랑길을 함께 하지 못했는데 나머지 구간을 혼자서라도 도보할 것을 다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