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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부산,경남여행

경남 통영시 소매물도에서(전편)

by 삼도갈매기 2010. 6. 1.

 

 

2010년 5월 30일

경남 통영시 한산면에 소재한 "소매물도"에 다녀왔다

 

소매물도...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울렁거리고 고향처럼 그리운 곳

1984년 2월 회사 발령에 의해 이곳 소매물도에서 꿈같은 4개월을 보낸적이 있다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해서 이곳 주민들과 함께 어울리며 살았다고 해야할 것 같다.

 

30여년의 직장생활 중에 단 4개월이였지만 나에겐 결코 잊을 수 없고 추억이 서린 곳이였으니

언젠가는 다시한번 가봐야 될 것 같아 퇴직 후에도 머릿속에는 늘 소매물도의 영상이 아른거렸었다

 

 

 

금년 봄 소매물도를 가려고 마음 먹었다

그런데 이곳에 가려면 바닷물이 빠지는 썰물때를 잘 맞춰야 한다...

섬 여행에 물때를 맞춰야 하고, 일기예보도 보아야 하니 모든게 쉽지 않았다 

 

 

 

소매물도 가는 유람선 "매물도 구경"호의 멋진 모습

 

예전엔 통영항에서 어선을 개조한 여객선(?)을 타고

무려 3시간 이상을 낙엽처럼 떠 다녀야 겨우 도착하는데

요즘은 거제시 남부면 저구항에서 위 사진에서 보듯이 멋진 유람선을 타고

40분만에 소매물도에 도착하니 세상 많이 좋아졌으며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행정구역 명칭은 "경상남도 통영시 한산면 매죽리 매물도"

매물도는 대매물도와 소매물도로 나뉘며 썰물때에는 소매물도 등대섬이 연결되어 걸어서 다닐 수 있다

등대섬 뒷편은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바다와 돌기둥이 있어 파도와 어우러진 모습이 장관이다 

 

1870년경 김해 김씨가

소매물도에 가면 해산물이 많아 굶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거제에서 입주하여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섬 이름은 말(馬) 형상을 하고 있다는 뜻에서 마미도라 불리었고 마미도는 매미도로,

매미도가 매물도로 변음되었다고 한다.

이곳의 관광자원으로서는 한려수도의 경관과 남매바위를 비롯한 기암과 등대섬이 있으며.

청정해역으로 미역, 김 등 해산물이 풍부하다고 한다.

 

 

(사진 설명 ; 사진 오른쪽 노란색 건물이 마을의 발전시설...

예전에 세관에서 만든 발전시설로 지금은 마을에 기부했다 한다) 

 

 

소매물도는 아주 작은 섬이다

그러다 보니 마을집 들이 한곳에 모여있다

1984년 내가 이곳에 근무할때엔 20여호의 주민들이

바다에서 미역양식과 산(山)을 개간하여 텃밭을 일구면서 살고 있었는데

지금은 외지인들이 소매물도 가옥들을 매입하여 관광객을 위한 숙박시설로 개조한 모습이다

예전에 살던 주민들은 거의가 육지로 이주하였고 이곳에서 장사하는 모든분들이 전부 외지인이며

심지어 선착장 입구에서 멍게, 해삼, 소라 등을 판매하는분들도 모두가 외지인이라고 한다

 

 

 

사진을 보고 있으려니 26년전 일들이 어제처럼 떠오른다

위 사진 좌측에 멋진 펜션이 자리하고 있는곳에 사람이 살지않는 초가집이 있었다

주인도 없는 초가집에 가방을 내려놓고 시골살림에 어설픈 아내와 살림을 시작하였는데

지금은 그때의 모습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사진에서 보듯 멋진 팬션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이곳 생활 중 밥과  반찬은 석유곤로로 해결할수 있었지만 가장큰 문제는 나무로 군불을 지피우는 일이며,

밤에 우릴 괴롭히는 많은 모기떼와 벌레(지네, 파리, 뱀 등)와 함께 지내는걸 아내가 무척 힘들어 했었다. 

 

 

 

소매물도 선착장에서 좌측을 쳐다보면 사진에서 보듯이 멋진 바위가 보인다

그 시절 이곳에서 낚시질하던 곳으로 볼락과 노래미를 잡아서 반찬을 하였고

갯가에선 미역과 해삼 그리고 군소가 널려있던 곳으로 우리집 아이들과의 추억이 서린 곳이다.

 

요즘은 이곳 언덕을 "폭풍의 언덕"이라 부른다고 한다

  

 

 

소매물도 선착장에 내리면

이곳이 "천혜의 자연경관을 간직한 소매물도"라는 입간판이 관람객들을 반긴다

 

 

 

소매물도 최고봉인 갓파른 망태봉을 오르면서

산 중턱에서 뒤돌아서 마을의 모습을 담았다(사진 위 아래)

예전의 허름한 초가집의 모습은 찾을수는 없고 멋진 팬션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으며

돌담길 사이로 겨우 한사람 지나갈 정도의 오솔길이 지금은 넓은 신장로 길로 바뀐 모습이다(사진 아래)

  

 

 

 

 

선착장에서 30여분쯤 오르면 폐교된 초등학교 모습이 보인다.

내가 이곳에 발령받아 왔을땐 초등학교 학생들이 10여명이 다녔었는데

우리집 큰아이가 6살이였으니, 내년까지 소매물도에 근무한다면 이곳에 입학시키려고 했었다

사진 오른쪽엔 커다란 후박나무가 숲을 이루었으며, 근처엔 동백나무와 함께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폐교된 초등학교 교문에 들어서니 

1997년 3월 1일에 세운 "교적비(敎籍碑)"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곳은 매물도 초등학교 소매물도 분교장터로 

1961년 4월 29일 개교하여 졸업생 131명을 배출하고, 1996년 3월 1일 폐교 되었음

 

 

 

망태봉(152m) 정상에 세워진 세관초소

그 당시 이곳의 정확한 명칭은 "장승포세관 매물도감시서"였던걸로 기억하며

감시서가 설치된 목적과  실적에 대한 내용이 아래 사진에 있으니 별도로 설명은 생략한다

 

이곳에 도착하여 초소를 쳐다보니 나도 모르게 목이 메이며 눈물이 맺힌다.

지나가는 관람객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 보았지만 눈물은 멈춰지지 않았다.

작년에 고향에 찾아가서 7년만에 부모님 산소에 엎드려서 울었듯이 그렇게 울먹였다.

아마도 아내가 이곳을 함께 왔더라면 아내도 나처럼 이렇게 울먹였을 것이다...

세관 초소에 서서 다시 생각해봐도 고생시킨 아내에게 정말로 미안한 생각이다

 

그 당시 초소에는 일본을 오가는 화물선들을 감시하는 레이다 시설이 설치되어 있었고

숙식을 하며 주변 세관과 상호 연락하면서 근무할 수 있도록 장비들이 사무실을 가득채운 상태였다.

그러다보니 사무실이 비좁고 또한 추워서 밥을 해 먹기엔 부족한게 많아 마을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이곳엔 회사 사무실로 사용했었는데...습기 때문에 고가(高價) 장비가 부식될 염려가 있어

아궁이에 석유버너로 불을 지피며 습기제거를 했었던 기억이 난다

 

 

 

세관 초소내부에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2층에 오르니....매물도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옛날 이곳에 올라서서 멀리 부산 하늘을 보며 언제 집에갈까 하면서

수없이 가슴을 태웠던 일들이 오랜세월이 흘렀지만 그때의 기억이 주마등 처럼 지나간다

(이곳에 오면서 아끼던 썬그라스를 잃어 버렸으니, 맨 얼굴로 흔적을 남겨본다) 

 

 

 

 

 

 

 

초소 내부의 모습(사진 위)

26년전 이곳 초소에서 근무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함께 근무했던 그 직원들은 다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현지 마을 주민이면서 직원이였던 배씨 성을 가진분 그리고 허씨 성을 가진 분은

어디에서 살고 계실까?.....예전처럼 다시 이곳에서 만날수 는 없을까?

(연로하신 마을 할머님에게 여쭤 보았더니...두분 모두 통영에 살고 계신다고 함)

 

 

 

소매물도 망태봉에 오르면 이렇게 아름다운 등대섬이 보인다

말문이 막힐정도로 아름답고 서정적인 모습이며, 푸른 초원아래 하얀등대, 푸른 바다가 하나 가득 파도에 출렁인다.
소매물도는 우리나라 섬들 가운데 사진 작가들이 가장 많이 찾을만큼 기막힌 풍광을 자랑한다고 하는데

그게 아마도 이곳에서 등대섬을 배경으로 일출과 일몰을 함께 구경할수 있으며

안개 자욱한 등대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기 위함일것이다

 

 

 

 

 

등대섬 모습을 4장 담았다, 허나 그 모습은 각각 다르다...

소매물도 정상인 망태봉에서 등대섬으로 내려가면서 사진을 담았으니.....

사진을 자세히 보면 멀리 보이는 작은섬의 모습과 등대의 등탑 모형이 조금씩 바뀌는것을 느낄수 있다

 

 

 

 

 

 

 



이국적인 멋이 가득한 등대섬 전경은 소매물도 제 1의 볼거리이니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섬 여행의 참 맛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1984년 아내와 아이들을 이곳 벼랑끝에 세워두고 소매물도 등대를 배경으로 사진을 담았다.

앞줄에 큰녀석(6세), 뒷줄에는 작은녀석(4세)...큰 놈은 이곳이 어렴풋이 떠 오른다고 한다

그때 찍은 사진들이 앨범에 몇장 있는데 지금은 스캔을 할 수 없으니 이것으로 대신하려고 한다

(위 사진은 퇴직 전에 회사에서 스캔하여 보관했던 사진임)

 

 

 

 

 

등대가는길 몽돌밭(자갈마당)까지 내려왔다

예전엔 이렇게 계단이 설치되어 있지않고 바위를 타고 오르락거렸는데

지금은 계단으로 편리하게 만들었으니 이곳을 구경하는데 힘들지 않으니 좋아 보인다

 

 

 

5월 30일이 음력 열이렛날이다...한낮에 썰물때가 오는 날

소매물도로 출발할때 집에서 바닷물를 셈해보니 아홉물 때 였다

아홉물 때 라면 밀물과 썰물의 차이(간만의 차이)가 제법 많을 때 이니

지금부터 약 30여분 기다리면 자갈밭 길이 보이며 등대섬을 쉽게 갈 수 있으련만....

성미급한 한국사람들 도저히 기다리지 못하겠다고 신발벗고 바지가랑이 걷어 올리고

70m의 몽돌길을 유유히 걷는 모습을 보니 그 옛날 모세가 지팡이로 홍해를 갈라

히브리 민족을 구했다고 하더니 소매물도에서 그 장엄한 모습을 재현하고 있는것 같았다(사진 아래)

 

 

 

 

 

지금으로부터 26년전인 1984년도엔 소매물도가 알려지지 않았을때

회사 직원들도 이곳을 유배지라 하여 모두가 근무하기를 꺼렸던 곳이였다

그런데 어쩌랴...월급쟁이가 위에서 가라면 가고 오라면 와야하는것 아니던가?

시쳇말로 까라면 까야할 판이니......군말없이 발령지에 가기위해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사실은 입사 10년이 되었으니 장기근무자로 지정되어 소매물도로 발령이 났던 것이다)  

 

여섯살과 네살인 두 아이와 여객선 외에는 배(船)를 타보지 않았다는 아내를 달래고 달래서

통영항에서 어선처럼 생긴 여객선(어선을 개조하여 사람을 실어나름)타고 무려 3시간을 떠 다니다가

도착한 곳이 말로만 듣던 소매물도 였으니 멀미에 파김치가된 아내와 아이들을 보면서 어찌나 서럽던지?

마을앞 선착장에 도착하니 한겨울의 매서운 바람이 우리를 반겼으니...그날이 생생하게 기억속에 남아 있다

(사실은 아내가 오늘 소매물도에 함께 가지않는 이유도 심한 배 멀미 때문이다)

 

난 원래 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으니 약간은 힘들어도 견딜만 했지만

아내는 섬 생활이 생소하였으니...더욱이 어린 아이들의 고생은 어떻게 말로 할 수 없었다

2월에 갔으니 섬 날씨는 무척 추웠는데 잠자는 방에 나무로 군불을 난생 처음으로 지피면서

불이 꺼져 연기가 매워서 울고, 자신의 처지가 슬퍼서 흘렸던 아내의 눈물은 지금도 잊을수가 없다 

 

전기도 없는 캄캄하고 눅눅한 방에 누우면 커다란 지네가 방안을 쩍쩍 기어다녔던 기억

(내가 시골 태생이라서 지네가 기어 다니는 소리를 알았서 때려 잡을 수 있었다)

마을 어르신들이 구렁이를 잡아 끓이면서 한사발 가득 떠주니 얻어 먹었던 기억

위 사진에서 보는 몽돌밭에서 무먹만한 고동을 양동이에 가득 잡아서 삶아 먹던 기억들

함께 근무하던 직원의 아이가 밤새 위급하여 장승포 대우조선소에서 귀빈용으로 사용하는

헬리곱터가 밤 공기를 가르며 소매물도 분교에 내려 아이의 생명을 구했던 기억들....

그 많은 기억들이 지금은 좋은 추억이 되어 이렇게 이야기 하지만 그 당시엔 너무도 힘들었던 일들이였다  

 

다음편은 등대섬의 아름다운 모습과 섬 주위의 기암괴석들의 모습을 보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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