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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장거리 여행

충북 옥천 여행기 - 시인 정지용 생가 외(外)....

by 삼도갈매기 2011. 10. 18.

 

 

 

 

 

 

2011년 10월 16일,

33년전 오늘 사랑하는 첫째딸 귀 빠진 날이니 오늘이 10월중 가장 좋은 날인듯 싶다.

 

8 ~ 9년 전 대전에서 직장생활하며 부산과 대전을 고속버스와 기차로 매주 오르내리면서 

그곳과 가까운 충북 옥천(沃川)이란 도시를 지나갈때...그때부터 도시명의 친근함에 매료 되었으니....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진 "향수"라는 노랫말을 지은 정지용 시인의 생가와

1974년 대통령영부인으로 짧은 생을 마감한 육영수 여사의 생가를 보기 위해 그곳을 가려고 벼르다가 

오늘(10월 16일) 부산유유자적여행자클럽 회원들과 함께 마음속에 그리던 옥천여행을 하기로 하였다. 

 

오전 7;30분 회원들과 함께 부산을 출발 경북 칠곡휴게소에서 잠시 휴식한후 3시간만에 옥천에 도착 

아래사진 처럼 황금벌판에 누렇게 읶은 풍요로운 가을의 풍경과 함께 옥천여행을 시작하였다.

 

 

 

 

 

 

- 둔주봉 한반도지형 전망대에서.....

 

충북 옥천군 안남면 연주리 둔주봉(384m)은 그리 높지않는 봉우리로 경사가 완만해 산책을 즐기며

가벼이 오를수 있는 곳으로 이곳 전망대에선 한반도지형을 볼수 있으며 강이 굽이쳐 산을 품는 모습으로 유명하여 

금강의 물줄기가 이뤄 놓은 절결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풍경을 볼수 있는 둔주봉 정자가 있는 곳으로 향하였다.

 

 

 

 

이곳의 소나무가 다른 소나무와는 다르게 하늘을 향하여 곧게 뻗어있음을 알수 있다.

하루전에 비가 내린듯 땅은 촉촉하였으며 소나무향 냄새가 콧끝에 스치는 바람과 함께 향긋함을 전한다.

사진에서 처럼 소나무 숲을 30여분쯤 걸으면 한반도 지형을 볼수 있는 둔주봉정(屯駐峰停)이 나온다.  

 

 

 

둔주봉(275m) 한반도지형 전망대에 올랐다.(위 사진이 한반도 지형임)

금년 봄에 강원도 영월 선암마을에서 한반도지형을 보았으며 지난번 충북 괴산에서 보았고 오늘 또 보았으니 3번째 보는듯 하다.

이곳 한반도 지형은 좌우가 바뀐모형이라 약간은 아쉬웠지만...휘돌아 나가는 금강의 맑은 강물이 삼면이 바다인 한반도 지형을

이룬듯한 모형이며 푸른 산세와 맑은 강물까지 신비로움마져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오늘 옥천여행을 함께한 회원들과 한반도지형 앞에서 기념 사진을 담았는데....

회원이 너무 많아서 한장에 담을수 없음이 아쉬웠다.(보이지 않는 분들은 유유자적카페에서 확인하세요)

이곳 둔주봉 정상에 오를땐 힘들어 하더니 사진에 담을땐 모두가 환하게 웃는 모습이 어린아이들 마냥 재밌다.

 

참고 ; 384m의 둔주봉은 산 오른쪽 600m 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이곳은 275m에 자리한 둔주봉정 팔각정 앞이다

 

 

옥천군 안남면에 있는 둔주봉에 오르면 저절로 탄성이 터진다, 둔주봉의 두 봉우리 중 275m 봉에 오르면 한반도 형상을 띤 풍경이 사람들에게 신비로움을 불어 넣기 때문이다. 금강의 물줄리가 굽이굽이 만들어 놓은 지형의 모습이 마치 꼭 닮은 우리 한반도 같다.

둔주봉은 산세가 험하지 않아 오르기 쉽고, 푸른 소나무 숲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어 신림욕에 좋은 곳이다.

둔주봉 정상의 한반도 지형 모습을 구경하고 근처 안남면에 자리한 "장계관광지"로 향하였다.

 

 

 

 

 

- 장계관광지 에서....

 

옥천의 대청호 호반 중 가장 장쾌한 풍광을 조망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곳으로 한적한 호숫가를 거밀며 산책을 할수 있는 곳이며

근처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호수를 바라보거나 한적하고 고요한 수면을 사색하며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할수 있는 곳이다.

이곳엔 옥천의 역사와 민속자료 등을 보관하는 향토전시관이 있으며, 100여명의 작가들이 만들어 놓은 "멋진 신세계"도 볼수 있는 곳이다

 

 

 

 

장계관광지에는 가족단위의 휴식공간도 만들어져 있었으며

위 사진처럼 이색적인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었고, 그 전망대 끝에서서 전방의 대청호를 조망할수 있었다.

아래 사진은 유유자적여행자클럽 대장님이 내 모습을 찍어서 카페에 올려둔 사진을 이곳으로 옮겼다...대장님 고맙심다

 

 

 

아름다운 대청호반을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장계관광지...

오늘 날씨가 제법 쌀쌀하고 바람까지 세차게 불어 아쉬움이 많다..

맑은 날씨엔 이곳 호수에 잔잔한 음영과 함께 멋진 풍광을 보인다고 하며

겨울철엔 대청호반의 매력적인 설경을 만끽하려는 이들로 인기가 높은 곳이기도 하다.

 

 

 

한적한 호수가를 거닐며 산책을 즐길수 있는 산책공간도 만들어져 있었다.(위 사진)

 

 

위 사진은 장계관광지 향토전시관앞에 만들어진 돌탑이며

민속자료 제 1호로 지정된 옥천군 청마리 제신탑으로 그 내용은 아래사진을 참조하시기 바람

 

 

장계관광지내에는 대청호의 자연을 배경으로 주옥같은 시를 감상할 수 있는 "일곱 걸음 산책로"를 따라 정지용 시인의 작품 세계와 지용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의 시를 따라 읽다보면 어느새 시화집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을 알 수 있는 곳이다,

시인의 원고지를 연상케하는 모단광장의 "모단가게"와 호수를 바라보며 차 한잔의 여유를 즐길수 있는 "카페 프란스"에서 휴식을 취할수 있는 곳이며, 금강을 주제로 하는 건축가, 디자이너, 아티스트, 문학인 등 100여명이 참여하여 모두가 꿈꾸는 이상향의 풍경인

"멋진 신세계"를 펼쳐놓기도 한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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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지용 시인 생가와 정지용 문학관에서....

 

옥천의 자랑인 정지용 시인의 생가와 문학관은 도심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었으나 

개발이 되지않고 옛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어 영화촬영지를 이곳에 옮겨놓은듯 한 착각을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진 정지용 시인의 "향수" 시비(詩碑)가 생가 입구에 비문처럼 새워져 있었다.

시비에 새겨진 향수를 입속으로 읊조리다 보니 까닭도 없이 왈칵 그리움이 복바쳐 오르며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고향에 대한 향수가 사무친다. 얼룩백이 황소의 울음소리를 듣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드는 기분도 들지만 그 누가 자신이 태어난 고향에 대한 향수를 꿈엔들 잊을 손가?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시비의 뒷면에는 그 옛날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성큼 끄집어내게 한 시 한편이 새겨져 있다.

"할아버지가 담뱃대를 물고/들에 나가시니/궂은 날도/곱게 개이고/할아버지가 도롱이를 입고/들에 나가시니/가믄 날도/비가 오시네".... 이 얼마나 소박한 표현인가? 역시 옥천에 오길 잘한것 같다. 내가 태어난 고향은 아니지만 정말 고향에 온 기분이 들었다.

 

 

 

작은 사립문을 밀고 들어서면 자신도 모르게 아련한 그리움과 함께 가곡 "향수"를 흥얼거리게 된다

 

정지용 시인은 1902년 옥천군 하계리(지금은 죽향리)에서 태어나서 그곳에서 자랐다.

어린시절 근처 옥천보통학교(지금의 죽향초등학교)에 다녔으며(교정에는 아직도 그 건물이 남아 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아내 송재숙(관례대로 12세에 결혼함)을 고향에 남겨둔채 서울생활을 시작하게 되며

그때부터 지용의 마음속에 "향수(鄕愁)"가 서서히 싹이 텄다고 전한다....

 

서울에서 한학을 공부하던 시인은 17세에 휘문고보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시(詩)에 눈을 뜨게 되었으며

그후 시인은 일본 유학후에 귀국하여 휘문고보에서 교편을 잡았고 김영랑, 박용철 등과 함께 "시문학" 동인으로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였으며 한국 문학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한땐 이념 대립으로 인하여 그의 시를 읽을 수 없었으나 

1988년 복원되어 정지용 시인은 우리 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이제 충북 옥천은 시인 정지용의 고향임에 틀림없는 곳이다.

 

 

 

위 사진은 시인의 생가(生家) 초가집 내부(방안)의 전경....

시인의 모습과 그가 생전에 즐겨 읽었다는 "얼골 하나야 손바닥 둘로..."로 시작된 "호수"라는 시와

할아버지를 그리워 하던 시(詩) 그리고 방안 한가운데 질화로가 덩그란히 놓여 있어 시인의 옛 정취를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생가와 담장하나를 사이에 두고 시인의 동상과 함께 정지용 문학관이 현대식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생사도 무덤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2005년 5월 그의 102회 생일을 맞아 그의 삶과 문학을 기리는 "정지용 문학관"이 생가 옆에 세워졌다. 영상실, 문학전시실, 문학교실로 꾸며진 문학관에는 그의 업적과 시 세계에 흠뻑 빠질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정지용 문학관 내부의 모습으로 시인의 삶과 문학을 이해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이다

이곳엔 간락한 연보와 작품소개, 희귀한 시와 산문집 초간본이 전시되어 있으며

다양한 멀티미디어 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뮤직 비디오 형태로 만들어진 가곡 "향수"를 감상할 수도 있는 곳이다.

 

 

정지용 문학관 전면에 시인과 함께 나란히 앉아 사진을 찍울수 있도록 벤취를 만들어 두었다.

이곳을 방문한 회원들 모두가 시인과 나란히 앉아 사진을 찍는다...물론 아내도 시인과 팔짱을 끼고....

 

 

문학관 내부에는 시인이 년도별로 발표한 주옥같은 시와 함께

매년 시행하는 "지용문학상 수상작"과 작품의 내용들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시인의 생가를 관람하고 간판과 벽에 새겨진 정지용의 시를 지줄대며 길을 걷다보면 재미가 있어 시간가는 줄을 모른다.

눈에 띠는 간판들의 시를 흥얼거리며 향수길을 걷다보면 아래 사진처럼 가뭄때문에 물은 없지만 실개천이 휘돌아 나오고....

이곳 근처가 "향수거리"였으며, 근처 아파트도 "향수 아파트" 그리고 "향수상회" 등등...모든게 향수와 관련되어 있으니

<향수>가 그만큼 정지용의 시를 대표하고 있는 탓일 게다.

 

 

정지용 시인은 1945년 해방이 되자 이화여자대학 교수로 옮겨 문과과장이 되었으며 1946년에는 좌익 성향이 짙은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및 경향신문 주간이 되니 이때부터 시인은 고난의 길을 가게 된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전향강연에 종사한다. 그러다가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지용은 전쟁 3일 만에 녹번리 집에서 북의 정치보위부에 자수하러 간다고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영영 행방불명이 되고 만다. 이후의 행적에는 여러 설이 있으나 월북했다가 1953년 북한에서 사망한 것이 통설로 알려져 있다.

 

전쟁 후 지용이 월북했다는 기사가 나오면서 그의 시는 발간금지가 되며 한국 근대시 문학사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지고 만다. 그의 가족들도 월북자 가족으로 분류되어 한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 후 40년이 지난 1988년에야 지용의 작품은 해금이 되어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2001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 북에 있는 그의 셋째 아들 정구인이 정지용과 큰 형 정구관을 찾는다는 신청이 있어 세상을 놀라게 한다.  정구인은 실로 51년 만에 큰 형 구관과 누이동생 구원을 만났다. 이 사실은 지용이 북에 가기도 전에 사망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전쟁 통에 행방불명이 되어버린 그가  어디서 죽었는지, 어디에 묻혔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생과 사의 기로에 서서 생존을 위한 우익과 좌익의 이데올로기가 어떠하든 지용이 빚어낸 시는 아름답다 못해 찬란하기까지 하다. 그의 섬세한 언어 구사와 선명한 이미지의 표현은 시를 읽는 이로 하여금 누구나 쉽게 빠져들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만다. 강한 향토적 정서와 곱게 다듬어진 우리말의 섬세한 이미지는 순수한 감각적 서정이 깊숙하게 깃들어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감동을 자아내게 한다.

 

그가 살아서 고향에 다시 돌아온다면 뭐라고 읊조릴까? '흙에서 자란 내 마음/파란 하늘빛이 그리워/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풀 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그가 노래한 <향수>의 시처럼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이슬 젖은 풀 섶을 휘적이며 돌아다닐까?

 

옥천의 어디를 가나 정지용의 시는 구석구석 물결치고 있다. 고향이 없는 자도, 고향을 잃은 자도, 설혹 고향이 있을지라도 옥천에 가면 마음속 고향을 찾게 된다. 우리모두 고향이 그립거든 충북 옥천으로 가보는게 어떨까 혼자 생각하며 미소 지어본다.

(위 내용 인터넷에서 부분 발췌)

 

 

 

정지용 생가를 관람하고 근처에 있는 육영수 여사의 생가로 발길을 옮겼다

위 사진의 이정표대로 시인의 생가와 영부인 여사님의 생가는 걸어서 10여분 거리로 아주 가까웠다.

가는 길에 수령 370년 된 커다란 느티나무가 길가에 서있었으니....고목나무에 매미한마리 붙은 형국이다(아래 사진)

 

 

 

 

 

 

 

- 영부인 육영수 여사 생가에서....

 

육영수 여사는 따뜻하고 자애로운 영부인으로 지금까지도 기억되고 있는분이며,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최고의 영부인으로 이곳에서 낳고 자랐으며 이곳은 1920년 육영수 여사의 부친이 매입한것으로 알려졌다. 영부인이 된후 어린이대공원, 어린이회관, 여성회관 등의 건립을 주도했으며, 어린이와 여성, 소외된 노인과 불우 청소년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남달랐던 분이셨다

(주소지 ; 충북 옥천군 옥천읍 향수길 119(교동리 313번지)

 

 

 

대문으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만난는 곳 - "사랑채"(위 사진)

사랑채는 정면 3칸의 사랑대청과 정면 2칸의 온돌방으로 전면에는 툇마루가 있고,

온돌방의 후면으로 전화방과 암실, 창고 등의 부속공간으로 구성되어 있고 주로 귀빈접대 등에 사용되었으며

예전에 박정희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할시 임시 집무실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안채" - 안채는 사랑채 뒤에 있는 가옥으로 "ㄷ"자형의 구조로 몸체는 정면 2칸의 안방과 정면 2칸의 대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면에는 툇마루가 있고, 대청마루는 우물마루로 되어 있다. 안방에는 어머니 이경령 여사가, 골방에는 육영수 여사가,

동쪽 날개채 안사랑에는 아버지 육종관씨가 주로 거주하였다고 한다.

 

 

위 아래 사진은 안채 뒷뜰의 모습

이곳 뒷뜰에 육영수 여사가 거쳐하던 방이 있으며, 아래 사진처럼 연자방아 그리고 카다란 뒤주가 2개 놓여 있었다. 

 

 

 

육영수 여사 생가에는 여사님이 살아계실때의 모습을 담은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육영수 여사는 1925년 11월 29일 아버지 육종관씨와 어머니 이경령 여사 사이에서 1남 3녀 중 셋째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 부터 어머니의 가정교육을 충실하게 받아 항상 예의가 바르고 침착한 성격이였다.

 

1938년 옥천 죽향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배화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하였는데 학창시절 수예 솜씨가 뛰어났으며,

요리에도 남다른 솜씨를 발휘하였다고 한다, 1942년 배화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동집으로 돌아와 집안일과

아버지 사업을 도왔으며, 1945년 11월에 옥천여자중학교 가사 담당교사가 되어 학생들에게 수예, 도화(미술)등을 가르쳤다.

 

1950년 6 .25전쟁 때 피난 온 부산집에서 송채천 소위의 소개로 박정희 소령을 처음만나 그해 12월 대구에서 결혼하여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대통령 영부인이 되어 서울 남산 "어린이회관" 건립, "어깨동무" 발간, 능동에 "어린이 대공원" 을 만들어 미래의 꿈나무, 청소년 육성에 많은 열정을 쏟았다. 그리고 양지회 봉사활동 등을 통해 고통받고 소외된 서민들을 위로하고 실의에 찬 국민에게 용기를 주는 등 헌신적인 영부인으로 활동하였다.

 

국민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영부인으로 살다 1974년 8월 15일 제29회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문세광의 총탄에 맞아 운명하였다.

 

 

 

 

"윗채" - 교동가옥의 가장 후면에 자리한 가옥으로 "ㅁ"자 형의 구조로 서쪽은 안채에서 통행할수 있는 진입로이며,

동쪽에는 외부에서 직접 진입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공간구성은 안채와 거의 유사하며 정면 2칸의 안방과 정면 2칸의 안대청이 있고, 전면에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안방의 서쪽에는 부엌이 있고 부엌의 상부에는 다락이 구성되어 있어 안방에서 사용하였으며 함실부엌과 연속되는 날개채에는 행랑과 식모방이 있다.

 

아래사진은 이곳 육영수 여사의 생가에 대한 해설사의 설명을 귀 기울이며 경청하는 모습

 

 

충북 옥천군 옥천읍 교동리 313번지에 위치한 이곳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인 육영수여사가 1925년 11월29일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냈던 곳으로, 이 집은 흔히  "교동집(校洞宅)" 이라 불려지던 옥천지역의 명가로서 1600년대부터 김(金)정승, 송(宋)정승, 민(閔)정승, 삼정승(三政丞)이 살았던 곳으로, 1894년 경에 축조되어 조선시대 상류 계급의 건축구조를 대표할 수 있는 집이었다고 한다.

 

1918년 육영수 여사의 부친인 유종관(陸種寬)씨가 이 집을 매입한 후 기단을 높여 개축하였다고 전하여지는데,

당시에 10여동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며, 사랑채,내당, 사당, 별당 등이 팔작지붕의 형태를 지닌 가옥이었다고 한다.

 

1969년 현대건설에 의하여 전면적으로 개.보수를 하면서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고,

1974년 육영수 여사 서거이후 방치되어 오다 1999년 철거되어 생가터만 남아있게 되었다.

 

그후 2002년 4월 26일 육영수 생가지(陸英修 生家址)가 충청북도 기념물 123호로 지정되었고, 옥천군에서 육영수여사 생가 복원 계획을 수립하여 2002년 육영수 생가지 지표조사를 실시하고, 2004년 12월 안채복원공사를 시작으로 사업비 3,750백만원을 투입하여 건물 13동 및 부대시설(담장, 석축, 주변정비 등)을 2010년 5월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옥천의 유명지를 돌다보니 점심때가 훌쩍 지나...시장끼를 느꼈다.

오후 2시쯤, 이번에는 "옥천 맛 기행"으로 근처에 있는 음식점에서 어탕국수와 위 사진에서 보는 "도리뱅뱅이"를 먹을수 있었다.

(참고 ; 도리뱅뱅이란 피래미를 둥글게 빙빙 돌려서 내는 모양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함)

 

이름도 특이한 도리뱅뱅이는 금강 상류에서 잡힌 피래미를 후라이팬에 통째로 튀겼냈으며 이고장 특산품인 밤(栗)과 함께 만들었다는 "알밤막걸리"와 함께 곁들여 마셨으니....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먹기 바빠서 사진을 찍지 못함) 금강상류에서 잡힌 민물고기로

곰탕을 끓이듯 푹 고아서 육수를 낸후 그 국물에 국수를 말아먹는 어탕국수(어죽국수)의 맛은 일품이였다고 감히 이곳에 말할수 있을정도의 얼큰하고 달콤한 맛이였다...   

 

아래사진은 옥천의 소금강이라 불리우며 병풍처럼 풍경이 아름답다는 "부소담악(赴召潭岳)"을 찾아 가다가.....

길을 잃고 헤매이던 중 저녁노을 음영이 아름다운 이름모를 호수가에서 기념으로 남긴 사진임.

 

 

 

옥천 여행을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오는 길에...

추풍령 휴게소에서 회원모두가 둘러앉아 시원한 막걸리 한잔과 도토리 묵으로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오늘 여행을 위하여 멀리 경남 거제도에서 막걸리를 공수해 오신 "만고강산님"의 정성에 감사드리며....

 

 

옥천은 충청북도 남쪽에 자리한 도시로 소백산맥과 노령산맥 중간에 있는 도시로 푸른 산들과 기름진 옥토로 풍요로운 땅이며.

삼국시대엔 신라와 백제가 번갈아 주인이 되던 격전지이며, 옥천의 서쪽엔 환산성과 관산성 터가 있으며 월전리 구진벼루 전투에서 백제 성왕이 신라군에게 패하여 참수형을 당했다는 곳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그후 조선 태종때에 이고장을 옥천으로 불렸으며 조선 고종때 군(郡)으로 승격되었다고 전한다,

 

또한 이곳엔 장령산 자연 휴양림과 금강유원지 그리고 농민들의 생활상을 볼수 있도록 만든 농심테마공원 등의 체험관이 있으며

충북 유형문화제 제10호인 옥천지석묘와 제156호인 옥천석탄리입석, 제157호인 옥주사마소 등 문화유산이 산재되 있는곳이다.

또한 옥천 일대의 경관을 한눈에 볼수 있으며 신라 진흥왕 13년에 창건하였다는 "용암사"와 우암 송시열 선생의 혼이 담겼으며 조선중기 성리학자 조헌 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던 "옥천 이지당", 그리고 1940년대에 건축했다는 "옥천 천주교회", 해방전인 1936년에 건축하였으며 시인 정지용, 영부인 육영수 여사 등 저명인사를 배출했다는 "죽향초등학교"도 빼놓은수 없는 이고장의 자랑일것이다.

 

깊어가는 가을, 10월의 세번째 휴일...

비옥하며 기름진 옥토 그리고 아름다운 명소가 산재한 충청북도 옥천(沃川) 여행을 아쉽게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