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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장거리 여행

충북 영동군 여행기(전편) - 옥계폭포, 난계국악박물관, 영국사 관람

by 삼도갈매기 2012. 5. 22.

 

 

 

 

 

 

 

2012년 5월 20일(일요일)

부산 유유자적회원 45명과 함께  충청북도 영동군의 이름난 명승지를 여행하였다.

 

영동군(永同郡)은 백두대간이 도시의 동남부를 감싸고 있어 아름다운 산으로 둘러쌓여 있다. 

전북 덕유산에서 발원한 금강이 인근 금산을 거쳐 영동군 양산면으로 들어와 서쪽 귀퉁이를 돌아 굽이굽이 흐르며

"양산팔경(陽山八景)"을 빚어 놓았으니, 신라때는 길동이라 불리다가 통일신라 경덕왕 당시에 "영동"으로 고쳐 불리었다.

 

영동군은 우리나라 국토의 중심이고, 충청북도 맨 끝자락에 자리하여 전라도와 경상도를 접하고 있으며

국악의 고장으로 난계(蘭溪) 박연 선생의 천년혼이 살아 숨쉬는 곳이기도 하고,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이 분기되는 곳에 자리하여 

아름다운 산들로 에워쌓여 있으며, 이 아름다운 영동 월이산(月伊山)의 주봉과 서봉에서 내달리는 산등성이 아래 옥계폭포가 있다.

 

 

 

 

- 충청지역 폭포중 가장 아름다운 "옥계폭포"

 

영동은 국악의 거성이면서 예문관 대제학과 이조판서를 지냈고 3대 군왕을 섬긴 선비로 한시대를 풍미한 난계 박연(蘭溪 朴堧,

1378~1458)이 태어나서 자란 고향이다. 그가 고향에 돌아올때면 이곳을 찾아 피리를 불었다 하여 "옥계폭포(玉溪瀑布) 또는

박연폭포"라 불리우게 되었다고 전하는 옥계폭포는 충청지역에서 가장 아름답고 웅장하기로 유명한 폭포라 한다.

 

 

 

옥계폭포를 찾아가는 길은 주차장에서 천천히 걸어서 10여분 거리로

5월의 푸르름이 가득하고 한여름을 방불케하는 뙤약볕이였지만 시냇물소리를 들으며 걷는길은 상쾌하였다. 

 

 

 

 

옥계폭포 입구에 도착하였다. 표지석 상단에 둥근 달을 등지고 커다란 대금을 불고 있는 형상을 보니

그 옛날 선비들이 하얀 달빛아래 피리를 불며 풍류를 즐기던곳임에 틀림없는 듯 옥계폭포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옥계폭포를 바라보면 여자가 누워있는 형상이니 옥(玉)은 여자를 뜻한다.

폭포 높이는 20m로 비단자락을 드리운 듯 곱고 신비스럽기 까지 한다. 주위 풍광도 뛰어난데다 울창한 숲이 있어

한여름에도 싸늘하고 오색물보라를 일으키며 내리꽂히는 물줄기는 속세(俗世)가 아닌 선계(仙界)를 방불케 한다.

 

 

 

 

어느날 옥계폭포를 찾은 난계 박연 선생은 오색 영롱한 폭포수 밑에서 피리를 연주할때

바위틈에서 피어난 난초에 매료되었다 하여, 난초 난(蘭)에 흐르는 시내 계(溪)를 써서 호를 "난계(蘭溪)"라 하였다고 한다.

 

 

 

위 사진에서 보듯 박연폭포 근처의 가로등이 이곳 분위기에 맞게 세워져 있으니...

피리를 든 선비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가 청사초롱이 매달린 궁궐 아래를 거닐고 있는 형상이다.

 

박연폭포는 깍아지른 듯한 절벽에 오색 물보라가 소나무 사이로 쏟아 장관을 이루고 있고

폭포아래는 옛 부터 많은 시인 묵객들이 즐겨찾던 곳으로 폭포입구 저수지에는 많은 물고기가 서식하며

빼곡이 우거진 노송의 숲과 그늘이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이루어 "충북의 자연환경 명소"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 "난계국악박물관" 관람

 

난계국악박물관은 충북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 230여평 2층 규모로 자리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3대 악성중 한분이신 난계 박연(蘭溪 朴堧)선생의 음악적 업적과 예술적 혼을 계승, 발전 시켜 나가고,

국악에 대한 이해와 교육을 통해 국악연구의 저변을 확대하며, 교육장으로서의 활용을 통해 예술적가치를 전수하고

국악의 본고장으로서의 면모를 갖추는데 설립목적이 있다. 

 

 

 

 

 

박물관 입구에 들어서면 난계 박연 선생의 흉상을 중심으로 양옆에 그의 생가와 사당의 큰 사진이 걸려있다.

우리일행은 좌측 영상실에서 난계선생의 일대기를 영상으로 감상하고 난계선생의 업적과 설화 그리고 국악의 역사성,

국악기 제작과정 악기의 이해 등을 이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면서 박물관 관람을 하였다.

 

 

 

 

세종(世宗)과 난계 박연 ;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었던 세종임금은

난계 선생의 음악적 재능을 매우 아꼈으며 두 사람의 만남은 조선시대 찬란했던 음악문화의 계기가 되었다.

 

 

 

악기제작과정 ;

편종, 편경 등의 악기제작과정을 모형화하여 만들어 두었다.

 

 

 

제례악 연주 모형 ; 제례악은 크게 세가지로 나뉜다.

역대 임금의 위패를 모신 종묘제사에 사용하던 "종묘제례악"과 공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서 제사때 쓰던 "문묘제례악" 정조가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제사에 쓰던 "경모궁제례악"  등이 있다. 이 중 "종묘제례악"과 "문묘제례악"은 세종시절에 창간되어

5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있는 음악이다. "종묘제례악"은 향악을 사용하고 "문묘제례악"의 경우에는 아악을 사용했다.

제례악은 연주하는 곳에 대뜰위의 당상(當上)에 해당하는 양의 위치인 등가(登歌)와 대뜰아래 당하(當下)에 해당하는 음의 위치인

헌가(軒架)로 양분 되어 연주되었다.(박물관에 기록된 문헌 참조)

 

 

 

뇌도(雷도) ; 뇌도는 음악을 시작하기 전에 세번을 흔드는데 북통 양쪽에 달린 가죽끈이 북면을 두드려서 소리를 낸다.

뇌도는 뇌고와 함께 조선 세종때 부터 사용되었으나 천신제가 폐지된 지금은 쓰이지않는다고 한다. 

 

 

 

 

사부(絲部)악기로

좌측부터 월금, 향비파, 당비파, 해금, 양금, 와공후, 수공후, 소공후의 악기로 전시된 모습.

 

 

 

운라(雲羅) ; 뇟쇠로 만든 작은 징 10개를 나무틀에 매달아 둔 형태다

두께에 따라 음고가 다르며 나무 망치로 쳐서 소리를 내는데 그 음이 경쾌하다. 행진 할때에는 밑에 달린 손잡이를 뽑아들고 치고

앉아서 칠때는 받침대에 세워두고 친다. 조선왕조 후기부터 대취타(大吹打)에 사용되었다.(박물관 기록문헌 참조)

 

 

 

편종(編鍾) ; 편종은 16개의 종을 상단과 하단에 각각 8개씩 매달았다.

종의 크기는 다 같고 그 두께가 조금씩 다른데 종이 두꺼우면 소리가 높고, 얇으면 소리가 낮다.

각퇴(角槌, 뿔망치)로 아래 둥근 표를 한 부분 즉, 수(隧)를 친다, 편종은 고려때 부터 사용되었으며 조선왕조 세종때에 박연이

개량하여 많이 제작하였다. 지금도 편경(編磬)과 함께 문묘제례악, 종묘제례악, 낙양춘, 보허자 등의 연주에 쓰이고 있다..

(박물관 기록문헌 참조)

 

 

 

이곳 박물관에는 사진속 해설사가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전통 고유의 악기에 대한 설명을 자세하게 들려주고 있으며.

우리일행중 한분에게 편종을 직접 두드려보게 하여 거기에서 들리는 각기 다른 소리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편경((編磬) ; 편경은 단단한 경석(磬石)으로 만든 16개의 꺽어진 모양의 돌을 매단 것으로 편종과 짝을 이룬다.

각퇴(뿔망치)로 경의 긴쪽 끝을 친다. 고려때 부터 사용된 이 악기는 조선 세조때 박연이 개량하여 많이 제작했고

지금도 종묘제례악, 문묘제례악, 낙양춘, 보허자 등에 사용된다. (박물관 기록문헌 참조)

 

 

 

박물관 한켠에 세계 최대 북(천고)이 설치되어 있다.

아래 설명에도 있듯이 14개월동안 제작하였으며 영국기넥스월드레코드에 "세계 최대 북"으로 등재되었단다.

천고라 명명된 북은 소나무 원목 24,000재(15톤 트럭 4대 분량), 소(牛) 40마리로 제작되어 무게가 2톤이라니 거대한 북이다

 

 

 

 

박물관 해설사가 북에 얽힌 설명을 하더니

우리 일행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 북을 3번 두드릴수 있는 행운을 주겠다며 한분 앞으로 나오라고 한다.

 

일행중 제일 연장자이신 멋쟁이 노신사 김영길 회원님이 앞으로 나오셔서 이 북을 두드리는 행운을 잡았다.

"첫번째 울리는 북소리는 세계평화를 위해서, 두번째 북소리는 대한민국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 그리고 마지막 북소리는

유유자적클럽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서"....하시더니 힘차게 북을 세번 두드린다.....북소리가 얼마나 웅장하던지 모두가 감격했다.

 

 

 

여행때마다 늘 혼자 오시는 멋쟁이 노신사님 

이런 행운을 얻으셨으니, 오래오래 유유자적하시며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난계박물관 근처엔 위 사진처럼 길가 난간벽에 멋진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아래사진에서 처럼 박물관 앞에는 우리의 전통 국악기들이 조형물로 만들어져 세워져 있다.

 

 

 

 

 

 

 

 

 

- 충북의 설악 천태산 계곡에 자리한 "영국사(寧國寺)" 관람.

 

영국사는 양산팔경의 제 1경으로 풍광이 빼어나기로 유명한 사찰이다.

누구라도 충북 영동에 가면 꼭 들려야하는 영동 제1 관광지로 꼽히는곳으로 영국사는 요즘처럼 신록이 아름다울 때는 천태산 입구에서 사찰까지 이어지는 오솔길 산책이 최고의 비경을 자랑하고, 가을에는 사찰입구에 있는 은행나무와 더불어 천태산에 곱게 물든

단풍을 볼수 있는 최고의 풍광을 자랑하는 명소이다 

 

 

 

 

 

10년전 대전에서 직장생활 할때 동료직원들과 함께 천태산(715m)을 등정했던 기억이 있었고

영국사 입구의 거대한 은행나무 단풍과 은행에서 뿜어내는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던 기억들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산천은 그대로인 듯 한데....함께 산행했던 직원들은 어디에 살고 있는지 그립기만 하다.

 

 

 

오솔길을 따라 가다보면 엄청나게 큰 미끄럼 바위를 타고 내려오는 "삼단폭포"의 빼어난 절경을 볼수 있다.

10년전 이곳을 배경으로 직원들과 단체사진도 찍었으며, 내 앨범 한쪽엔 이곳 사진과 천태산 정상에서 찍은 사진이 있는데

집에 스켄이 없으니 그때의 모습을 보여줄수 없는게.....한편으로 안타깝기도 하다.

 

 

 

주차장 입구에서 20분쯤 오르면 위 사진처럼 거대한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223호)를 만나게 된다.

충북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에 자리한 이 은행나무는 살아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고목으로 대략 1,000~1,200살로 추정되며,

높이 31.4m, 나무가지 둘레11.54m, 나무뿌리 둘레를 치자면 어른 서넛이 손을 맞잡고 둘러서야 나무를 제대로 안을수 있다니 웅장

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서쪽가지중 하나는 밑으로 자라서 끝이 땅에 닿았는데 여기서 자라난 새로운 나뭇가지는 높이가 5m 이상이나 되고

가슴높이의 지름이 0.2m가 넘는다고 하니 이역시 대단함을 알수 있다. 또한 이 은행나무는 국가의 큰 난이 있을때에는

소리를 내어 운다고 하며, 가을엔 은행나무와 주변 경관이 하나로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며 격년마다 많은 은행이 열린다고 한다.

 

 

 

 

은행나무가 워낙 거대하여

가까이에서 사진을 담을수 없어 영국사 사찰내에서 나무 위부분만 담아본다(위 사진)

 

 

 

영국사 만세루 앞에서 내 모습을 담아주신 길라잡이 임대장님께 감사를 드림다.

 

천태산에 자리한 영국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 5교구 본사 법주사의 말사로 통일 신라 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 명종때인 12세기에 원각국사에 의해 중창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고종때 임금의 명을 받아 탑과 승탑 그리고 금당을

새로 지었고 국청사라 불리다가 그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이곳에서 국태민안을 기원함으로써 국난을 극복하고 나라가

평온하게 되었다 하여 영국사(寧國寺)로 고쳐 불렸다고 전한다(만세루 입구 표지석에서 글 옮김)

 

 

 

대웅전(大雄殿) - 충북 유형문화재 제61호

고려 명종때인 12세기에 원각국사에 의해 중창되었으며, 대웅전은 석가모니 불상을 모시는 법당으로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지붕위와 기둥 사이에 놓인 다포양식 건축물이다(대웅전 앞 표지석에서 글 옮김)

 

 

 

영산회후불탱(보물 제 1397호)

대웅전 내부 모습으로 영산회후불탱은 기로 289Cm, 세로 274.5Cm 크기의 불화로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문수, 보현 등의 보살과 10분의 제자들이 배치되어 있다.

 

 

 

영국사 삼층석탑(보물 제 533호)

대웅전 앞에 서있으며,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갖춘 완전한 형태다.

위 아래층 기단의 네면에는 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특히 윗층기단의 무늬는 모서리까지 침범할 만큼 크고 넓다.

기단 맨 윗돌에는 네 모서리 끝부분에서 약간의 치켜 올림이 있는게 주목된다.(대웅전 앞 표지석에서 글 옮김)

 

 

 

불기 2556년 부처님 오신날을 기념하여

이곳 영국사에서도 봉축행사의 일환으로 대웅전 앞마당에 연등이 매달려 있다.

 

 

 

 

 

사찰 오른쪽으로 오솔길을 따라 100m가면 "원각국사비"(보물 제 534호)를 만난다.

고려시대 승려 원각국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석으로 어려서 출가한 원각국사는 대선사가 되던 명종 4년에 입적하여

그 유해를 이곳 영국사에 안치하여 비를 세웠다고 한다(아래 표지석의 설명 참조)

 

 

 

 

사진속 앞에 보이는 "석종형 부도"(충북 유형문화재 제184호)

기단은 세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모두 8각이다, 기단 가운데 받침돌을 제외한 아래, 윗받침돌에는 연꽃을 조각하였다.

그 위로 종모양의 탑신이 올려져 있는데 그 위의 머리장식 조차 종을 메달때 쓰는 고리를 떠올리게 하여 실제 종과 비슷한 형상이다

 

사진속 뒷에 보이는 "원구형 부도"(충북 유형문화재 제185호)

탑신의 몸돌은 둥근 공모양이며 지붕돌은 8각으로 여러조각들이 생략되어 밋밋하고 투박하다. 지붕돌 위로는 꽃봉오리 모양을 한

머리장식을 올려 놓은게 특색이다

 

 

원각국사비와 두종류의 부도를 관람한후에 근처 소나무에 "연리지" 현상을 담았다.

연리지는 서로 다른 나무끼리 한몸이 되는것이라 하지만...위로 자라면서 이런 특이한 모습이 이채롭다..

 

 

 

영국사 부도(승탑) - (보물 제 532호)

영국사에서 남쪽으로 200m떨어진 언덕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스님의 사리 또는 유골을 묻는 탑의 일종이다

신라와 고려에서 많이 조성되었던 8각 원당형의 부도이고 재료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다.

 

건립연대는 신라말에서 고려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원각국사 유골이 영국사에 모셔졌다는 기록이 비문에 남아 있어

이 부도가 원각국사 사리를 모신것이 아닌가 추론해 본다, 단정하고 아담한 형태의 부도로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영국사 망탑봉(望塔峯) 삼층석탑 (보물 제535호)

이 탑은 영국사에서 동쪽으로 500m쯤 되는 작은 봉우리 정상에 세워져 있으며 커다란 화강암을 기단으로 삼고 위로 3층의 탑신을

올린형태다. 기단은 암석 윗면을 평평하게 다듬고, 탑 몸돌은 괴임 받침을 두고 그 위에 세웠고 지붕돌은 다른돌로 만들어 졌다.

고려 중기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 탑의 전체 높이는 2.43m.

 

 

 

망탑봉 삼층석탑 근처에 있는 흔들바위로 크기가 6m, 높이 8m, 무게가 10여톤인데

마치 고래가 헤엄치며 바다위를 오르는 형상을 하고 있는 바위로 혼자 흔들어도 움직여서 "흔들바위"라고 한다..

 

오늘 이곳에 함께 여행한 만고강산님 부부가 이렇게 멋진 포즈를 취해 주신다....두분 감사합니다.

(아래 두분은 사전에 양해를 구하지 않았으니, 초상권 관련으로 작게 현상했으니 용서하세요?)

 

 

 

아래사진은 천태산 흔들바위에서

우리일행의 차량을 주차했던 곳(아래 붉은색 차량)을 바라보니.....오솔길 산길을 따라 많이 걸은듯 하다.

 

영국사 뒷산인 천태산(715m)은 뛰어난 자연 경관과 잘 정돈된 등산로 그리고 주변에 많은 명소가 산재되어 있어 등산 동호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가족단위 등산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곳이다, 특히 양산팔경이 이곳 천태산 영국사를 제 1경으로 시작되고 많은 문화유적들이 그 신비함을 더해주는 곳이다. 

 

 

 

충북 영동군은 경상북도, 전라북도, 충청남도와 접해 있으며, 경부선의 중간지점에 위치한다.

영동은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의 전쟁터였으며 소백산맥 서쪽 기슭을 따라 속리산 북쪽의 남한강권이 신라와 고구려의

각축장이였던 곳에 비해 속리산 남쪽 금강권은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대였다고 한다

 

또한 영동은 한국 제일의 포도 재배와 감 재배지역으로 손꼽히며. 1개 읍인 영동읍과 10개면(매곡면, 상촌면, 심천면, 양강면,

양산면, 용산면, 용화면, 학산면, 황간면, 추풍령면)등 230개 동리가 있다. 군청소재지는 영동읍 계산리이며.

영동군 면적은 서울특별시 면적(605㎢)보다 큰 845㎢, 인구는 2012년 기준으로 50,980명(영동군청 홈피에서....)

 

다음 영동 여행기 후편은 박연 사당의 "난계사당"과 비운의 현장 "노근리 역사공원", 달(月)도 쉬어간다는 "월류봉"

그리고 법주사 말사로 백화산 일대의 아담한 사찰 "반야사"와 지장산 절벽위에 있는 문수전 등을 보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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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충북 영동군 양산 8경

송호리 지역을 중심으로 영동군 양산면 일대의 여덟 경승지를 "양산팔경"이라고 한다.

팔경 중에서 강선대와 용암, 여의정을 배경삼아 양강(금강 상류) 변에 자리잡은 유원지를 송호유원지라 하며,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다. 양산팔경의 중심지인 셈이다. 우리 국문학상 신라가요 목록에서 중요하게 헤아리는 양산가(陽山歌)의 고장 송호리는 양산을 꿰뚫고 남에서 동북으로 흐르는 금강 상류의 연안에 위치한 명승지이다. 이곳은 자연경관이 매우 빼어날 뿐만 아니라 신라와 백제의 끊임없는 싸움의 역사 속에 신라시대 김흠운 장군의 애환과 양산가의 유래가 깃들어 있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송호 국민관광지는 각종 운동시설도 잘 갖추고 있어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나들이로 추천할 만한 곳이다.

 

 

제 1경 ; 영국사 

충북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에 위치한 영국사는 양산 8경중 제1경으로 원래는 신라 원광법사가 반월사란 이름으로 세웠으나,

고려 의 대각국사가 국청사로 이름을 그쳤으며 그후 공민왕때 홍건적을 무찔러 나라의 안녕을 되찾은 것을 기념하여 영국사로 고쳐 부르도록 했다. 또한 이곳은 계곡의 기암과 울창한숲의 경치가 빼어나다.

 

제 2경 ; 강선대

강선대는 양산면 봉곡리 양강(금강) 기슭에 있는 누대로 1956년 6각 정자가 세워졌다. 

강가에 불쑥 솟아오른 10m의 바위 봉우리에 소나무가 무성히 자라고 있는 봉우리 중앙에  강선대가 위치하고 있으며 신선이 노닐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며 동악 이안눌과 백호 임제의 시가 있는 곳이다

 

제 3경 ; 비봉산

비봉대는 양산면 사무소 서쪽에 솟은 봉우리로, 삼국시대 때에 신라와 백재의 국경지대로 옛 성터가 남아 있다.  

 

제 4경 ; 봉황대

봉황대는 강 북쪽에 솟은, 봉화산의 남서쪽 강변에 있는 암벽으로 봉황정이란 정자가 있다.

 

제 5경 ; 함벽정

봉황대의 동쪽 강변 바위에 있는 정자로 옛날 선비들이 이곳에 올라와 시상을 떠올렸다고 한다.

 

제 6경 ; 자풍당

자풍당은 자라벌유원지 건너편에 있는 조선조 초기의 서당이다. 

 

제 7경 ; 용암

송호유원지 바로 앞의 양강 위에 치솟아 있는 큰 바위로 용이 선녀가 목욕하는 것에 반하여 승천하지 못하고 떨어졌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제 8경 ; 여의정

여의정의 녹음방초는 송호 국민관광지 숲 속에 있는 정자로, 만취당 박응종이 만년에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와서 만취당

이란 학문을 가르치는 집을 짓고, 마을의 자제들에게 예의 범절과 경서와 사기를 가르쳐 학자를 기르니 사림을 본받고 동경하는

고장이 되었다.그 후손들이 조상의 선덕을 돌이켜 생각하고 생전의 뜻을 기리는 뜻으로, 그 옛터에 집안들이 활동하여 1935년 가을

송호리 송림에 정자를 세웠다. 여의정의 녹음방초는 양산팔경의 하나로, 아침 저녁의 정경과 운치가 그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