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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부산,경남여행

경남 통영시 한산도에서 - 제승당과 망산 산행기

by 삼도갈매기 2012. 7. 24.

 

 

 

 

2012년 7월 22일(일요일), 24절기중 하나인 대서(큰大, 더울暑)절기다...

속설에 의하면 대서 절기가 얼마나 더웠으면 "살아있는 염소의 뿔이 녹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졌을까?....

 

부산 솔바람산악회원들과 함께 역사의 고장, 경남 통영시 한산도 제승당과 그곳의 최고봉인 망산(294m)을 산행하였다.

 

 

 

 

산행 코스(위 산행지도 화살표 참조) - 제승당 관람후 - 등산 안내판 - 더풀개(96m) - 벤치 - 당재(166m) - 망산교(望山橋) -

팔각정(休月亭) - 전망바위 - 추봉교(橋) - 봉암 몽돌해수욕장에서 버스로 어구행 선착장으로 원점 회귀(산행시간 4시간)

 

 

아침 8시 30분 부산을 출발, 가덕도와 거제를 잇는 거가대교를 경유하여 통영군 한산도와 가장 가까운

"거제시 둔덕면 어구리"에 도착, 위 사진의 한산도행 카페리 터미널에서 아래사진의 "을지 2호"에 승선하였다. 

 

 

 

하늘은 약간 흐려서 뙤약볕은 없으나 한여름의 무더위는 바닷바람도 소용이 없는듯 하다.

부산에서 이곳까지 타고온 산악회 대형버스외에 10대의 차량이 을지2호에 함께 승차되어 한산도로 향하였다.

 

 

거제도 어구마을을 출발하여 15분만에 한산도 소고포 선착장에 도착하였다.(위 사진 소고포 선착장)

한산도(閑山島)는 경남 통영시 한산면에 있는 섬으로 대략 600여세대가 거주하며, 전체 면적 14.785의 유인도로

통영에서 뱃길로 40여분 소요되나 정작 거제도와 가까운 섬이다.

 

 

선착장에서 가까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얼이 살아 숨쉬는곳 "제승당"을 향하였다.

산행을 위해서 한산도를 찾았지만 우리들에게는 "이순신 장군의 섬"으로 기억되는 곳이며, 한산도 앞바다를 비롯하여 한려수도의

바다는 어쩌면 이순신 장군의 바다이기도 하였으니, 어린시절 위인전을 읽을때 부터 한산섬을 동경하였는지도 모른다..

 

 

한산도 제승당은 경남 통영시 한산면 두억리 875번지에 위치한 사적 제113호이다. 경 내의 면적은 600,871㎡이며, 건물은 28동,

건평 1,602㎡이다, 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후 이순신은 한산대첩을 통해 바다의 제해권을 구축하였다.

 

그 후 제승당을 짓고, 1593년 선조 26년부터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원균의 참패로 소실된 선조 30년까지 4년간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으로 삼아 제해권을 장악하면서 국난을 극복하는데 기여한 유서깊은 사적지이다. 선조 30년 1597년에 폐진이 되었다가 142년 후인 1739년 영조 15년에 통제사 조경이 중건하고, 유허비를 세웠다.

 

1959년 정부가 사적 제113호로 지정하여 여러 차례 보수를 거듭해 왔다. 1975년 정부는 영역을 확장하여 보수를 하여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979년에는 한산대첩비를 건립하였다.(인터넷에서 발췌)

 

 

 

제승당에는 이순신의 영정을 안치한 영당을 비롯하여, 유허비, 그리고 많은 송덕비와 사정, 수루 등

부속 시설이 말끔히 단장되어 있어 주변의 수려한 경관과 더불어 당시 조선 수군 본영의 면모 추측해 볼 수 있다.

 

위 사진에서 처럼 "한산문"을 들어가면, 관리사무소와 휴게소가 있으며, 수호사와 대첩문을 거쳐 제승당에 들어갈 수 있다.

 

 

 

우물(井) ;

1593년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꼐서 한산도 통제영내 제승당(制勝堂)을 창건하고 1,340일동안 머물면서 군사들과 함께 사용했던 우물로서 바다와 가깝지만 짠맛이 전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주변에 기록된 표지판에서 옮김, 현재는 음용수로 부적합하다고 함)

 

 

 

대첩문(大捷門)
원래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은 통영 충렬사 재단 이사회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1975년 8월 "현충사 수준으로 대대적인 정화 사업을 펼쳐, 국민정신 교육의 도장으로 만들라"는 지시에 따라 경상남도가 통영 충렬사 재단이사회로부터 인수하여 1975년 ~ 1978년간 정화사업을 추진하여 건립한 것이다.

 

 

 

 

제승당 내부모습으로 임진란때 충무공께서 왜적선 73척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학인진 전법으로 그중 12척을 나포하고 47척을 섬멸하시던 대승첩 장면의 벽화인 "한산도대첩도"가 중앙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그외에도 사천해전도, 노량해전도, 진중생활도, 우국충정도 그리고 충무공의 친필인 국보 서간첩과 독후감 병풍 등이 보관되어 있다.

 

 

수루(戍樓)

원래 이 건물은 적의 동정을 관측하는 망루로 고증에 의해서 현 위치에 옮겨졌다. 

영조때 김천택의 청구영언에 실린 이순신 장군의 "진중시"의 배경으로 더욱 유명한 곳이다.

 

"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아래사진은 수루 중앙에 새겨진 이순신 장군의 진중시(陳中詩 )

 

 

 

수루에 오를려면 등산화를 벋고 올라야 한다...수루에 올라서 멀리 한산도 앞바다를 바라다 본다.

사진 왼편에 산위에 우뚝솟은 탑이 "한산대첩기념비"이며, 사진 오른쪽 바다에 떠 있는 "거북등대"의 모습이 보인다.

 

- 한산대첩기념비 ; 1592년 7월 8일 조선 수군은 견내량에서 73척의 배 중 12척을 사로잡고, 47척을 불태운 대승을 거두었다.

이것을 한산대첩이라고 부르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78년에 국비를 투입하여 문어포 산정에 거북선을 대좌로한 높이 20m의

《한산대첩기념비》를 건립하였다.

- 거북등대 ; 제승당 입구 바다 암초 위에 세워져 있으며, 1963년 12월에 세운 것으로 한산대첩지가 이곳임을 알리기 위해 세워졌다. 또한 이곳을 지나는 선박들의 등대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한다.

 

 

홍살문

제승당 좌측에 세워진 넓이 4m, 높이 5.3m의 문으로 충무사로 들어가는 화강석 박석통로가 시작되는 지점에 있다.

이곳에 유료로 갑옷을 입고 사진을 찍는 장소가 있었으나 시간이 많지않아 갑옷을 걸치지 못했음이 ...아쉽기만 하였다.

 

 

 

충무사(忠武祠)

홍살문을 지나 내삼문과 유허비가 있는 공간을 지나면 맨 안쪽으로 충무사가 나온다. 이 시당은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곳이며,

원래 조그만 사당을 헐고 1976년 10월 본 사당을 건립하였으며 매년 2회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이 영정은 1978년 정형모 화백의

그림을 봉인한 것이다.(아래 사진은 내부모습으로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셨다)

 

 

 

제승당 근처에 특히 충무사 근처에 아름드리 붉은 노송인 적송(赤松)이 무성하여 솔향기가 향을 피우는듯 하다..

또한 이곳엔 매년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며 한산대첩 기념일인 8월 14일에는 해군작전사령관과 사관생도들이 참배를 하고

통영시에서는 한산대첩기념식을 거행한다....참고로 자세한 안내를 원하면 www.한산도제승당.com을 클릭해 보면 알수 있음.

 

 

 

하루동안 둘러 보아야할 곳을 산행 때문에 3~40분만에 관람하였으니 아쉬움이 무척 크다.

 

벼락치기로 제승당 관람을 마치고 한산도 최고봉인 망산을 산행하기 위하여 되돌아 나오면서 주변 풍경사진을 담았다.

이곳 제승당엔 충무사를 비롯하여 내삼문, 유허비, 그리고 장군이 활을 쏘시던 한산정, 행적비, 충무문 등이 있다

(09;00 ~ 18;00까지 연중무휴로 개방하며, 제승당 관람료 1,000원)

 

 

 

 

제승당 관람을 마치고 산행들머리인 "등산 안내판"이 세워진 곳에 도착하였다.

안내판에서 보듯이 한산도 진두마을까지 7.2Km이니 오늘산행은 8Km이상을 걸어야할것 같다.(산행시작 지점)

 

 

 

등산 안내판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가파른 산길을 20여분 오르니 더불개(96m)라는 곳에 도착하였다.

숲으로 우거진 길이였는데...갑자기 하늘이 훤하게 트이면서 한산도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햇볕은 없지만 간밤에 내린 소나기로 땅에서 솟아오른 지열과 함께 숨이 턱까지 차오르며 구슬같은 땀이 쏟아진다...

 

 

산행중 군데군데....이곳이 역사의 길임을 알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산행 초입엔 소나무가 많았지만 정상인 망산을 지나고 부터는 "소사나무"가 주종을 이루었던걸로 기억된다..

 

 

 

 

산행시작 2시간쯤 흘렀을까?....

소나무 숲이 하늘을 가리고 있던 산행길에 갑자기 하늘이 보이면서 파도모형의 교각이 보인다

망산교(望山橋)로 명명되어 있늘걸 보니....한산도의 최고봉인 망산이 가까이에 있음을 알수 있다.

 

 

 

망산교를 지나서 부터 오르막 길의 연속이더니 한산도 최고봉인 망산(294m)에 도착하였다.

평소에 땀을 많이 흘리니....가급적 여름산행을 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산이 나를 부르니 고생을 사서하는 듯...

상의도 그리고 7부 바지도 땀에 젖었고....젖은 수건을 몇번에 걸쳐 짰으며, 모자에서는 땀이 비오듯이 뚝뚝 떨어진다.

 

 

 

한산도 정상인 망산에서 바라다본 한산도 주변 풍경이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함께 산행한 산행대장님이 이곳의 풍경을 ....베트남 하롱베이와 비교해 전혀 손색이 없는 풍광이란다

오늘은 햇볕이 없어 산행하기엔 좋지만 풍경사진을 찍기에는 사진이 선명하지 못함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정상에서 20여분 걸으면 위 사진속의 팔각정인 "휴월정(休月亭)"을 만난다.

이름에서도 알수 있듯이 달도 쉬어간다는 정자이니 이곳에서 바라다본 풍경이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뤘다..

 

아래사진은 휴월정에서 바라다본 진두마을(앞쪽 마을)과 추봉리의 봉암마을(뒷쪽 마을)의 어촌풍경이 한폭의 그림이다. 

 

 

 

다리 건너편 마을이 통영시 한산면 추봉도,

사진속 추봉마을 마을 뒷쪽에 봉암몽돌해수욕장이 있으니 그곳이 오늘 산행 마지막 도착지점이다. 

 

 

산을 타고 내려와 추봉교(길이 400m) 입구에 도착하였다.

2007년 7월 추봉도와 한산도를 연결하는 추봉교가 개통되어 차량을 이용하여 추봉도까지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단다.

참고 ; 추봉도 면적은 3.835㎢이며 최고점인 대봉산은 242m 높이를 자랑하며 근처에 한산사가 자리하고 있는 섬이다.

 

 

추봉교를 건너서 추봉도에 도착하였다.

입구의 추봉공원엔 사진에서 처럼 돌고래가 유형하는 모습의 조각상이 새워져 있었다.
추봉도에는 한국전쟁때 약 1만명의 전쟁포로를 수용했던 곳이기도 하며 지금도 포로수용소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추봉교에서 바라다본 한산도 진두마을 전경

어디서 많이 보았던 마을풍경이라는 생각이 든다.....그랬었다. 28년전 소매물도에 발령받아 6개월을 근무할때에

통영에서 여객선(?)을 타고 소매물도로 갈때 한산도를 경유하는데...이곳 진두마을앞 선착장에 접안했던 기억이 난다.

이곳 마을엔 보건지소 그리고 한산중학교가 있는 마을로 면사무소가 소재한 마을이니 한산도에서 가장 큰 마을인듯 하다..  

 

 

산행 마지막 지점인 봉암마을 몽돌해수욕장에 도착하였다.

해수욕장 길이는 대략 1Km로 한산도 남동쪽에 자리한 해수욕장으로 까만 자갈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행과 함께 해수욕장 근처 슈퍼에서 시원한 맥주를 마셨는데....땀 흘리고 마신 맥주 맛이 꿀맛이였다.

 

 

 

산행을 마치고 거제도 어구마을로 가는 선착장에서 거제행 을지 2호를 기다렸다..(오후 6시쯤)

하루종일 날씨가 흐려서 주변 섬들이 잿빛모습을 보이더니 잠시 햇볕이 보이면서 위 사진처럼 멋진 모습을 보인다..

 

 

 

카페리 여객선을 타고 한산도를 출발하여 거제 어구리로 향하였다.

아래사진은 거제도에 도착하여 하늘을 보니...약간의 빛내림 현상과 함께 석양이 물드는 현상을 담았다.

 

 

 

여름산행이 힘들어 가급적 산행을 자제 했는데....

오늘은 섬 산행이라 쉬울것 같아 따라 나섰지만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올해 임진년(壬辰年).....임진왜란과 관련된 역사의 섬 한산도 여행이였으니 보람있는 여행이였다.

 

 

 

참고 ; 충무공의 생애와 업적

충무공 이순신은 1545년 3월 8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1576년(선조 9) 식년무과(式年武科)에병과(丙科)로 급제, 권지훈련원봉사

(權知訓練院奉事)로 처음 관직에 나갔으며, 1592년(선조25년), 일본의 침입으로 발발한 임진왜란에서 수군을 이끌고 해전에 참가,

전 해전에서의 승리로 7년 간의 전란을 종식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명장이다.

 

충무공은, 대대적인 벌목 조선으로 전선을 증강시키고, 거북선 및 정철, 지자, 현자총통 등 신형 전선과 무기를 개발하여 왜란 전부터 조선 수군의 전력을 확충하는데 크게 기여해왔다. 뿐만 아니라 각종 해전술을 창안하고 명령계통을 일원화하여 조선 수군의 강력한 전투력을 배양했으며, 한산도에 과거장을 설치하여 군 인사 관리를 혁신, 무기체계 외에도 군 운영의 발전을 추구하여, 전쟁기간 동안 왜선 700여척을 나포, 격침시키는, 세계 해전사상 길이 남을 전과를 거두었다.

 

주요 해전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玉浦)에서 적선 30여 척을, 사천(泗川)에서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적선 13척을 격파했다.

당포(唐浦)에서 20척, 당항포(唐項浦)에서 100여 척을 각각 격파했으며, 7월 한산도(閑山島)에서 적선 70척을 무찔러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을 이끌었다. 7월 안골포(安骨浦)해전에서 승리하고, 9월 왜군의 근거지 부산에 쳐들어가 100여 척을 침몰시켰다. 1593년(선조 26) 다시 부산과 웅천(熊川)의 왜군을 격파하여 남해안 일대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명나라 수군이 원정을 온 후, 죽도(竹島)에 진을 옮기고 장문포(長門浦)에서 왜군을 격파,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왜군의 작전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1597년(53세) 정유재란 발발 후,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 되어, 명량으로 출전, 12척의 함선으로 133척의 적군과 대결, 31척을 격침시키는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듬해 철수에 돌입한 적선 500여 척이 노량(露梁)에 집결하자 명나라 제독 진인(陳璘)의 수군과 공동으로 적군을 기습, 승리로 이끌었으나 충무공은 이 해전에서 54세를 일기로 전사한다. (이상 인터넷에서 발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