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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부산,경남여행

경남 밀양시 영남알프스 둘레길(밀양 강변길)을 걷다

by 삼도갈매기 2012. 10. 4.

 

 

 

2012년 10월 3일(개천절)

인도행(인생길 도보여행) 회원 63명과 함께

경상남도 밀양시에 있는 영남알프스 둘레길중 하나인 "밀양 강변길"을 걸었다.  

 

 

 

 

우리일행은 위 지도에서 보듯이 밀양 강변길에 붉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밀양교 출발 ~ 영남루~ 밀양읍성~ 모과나무 사거리 ~ 추화산성~ 긴늪유원지 -(영천암 표지석으로 돌아와) ~ 오연정~

용평터널 ~ 월연정(백송) ~ 활성교(橋)~ 금사당  ~ 용두산 입구(팔각정) ~ 삼거리 입구 ~ 밀양역으로 하산(6시간 30여분 소요)

 

 

 

각 회원별로 기차를 이용하여 10시 10분까지 경남 밀양역에 도착하여,

간단한 자기소개와 인원점검을 마치고 단체사진을 찍었다.(63명인데 몇몇이 보이지 않는다)

이곳 밀양역에서 시내버스를 이용하여 "밀양교(橋)"에 도착 영남루를 시작으로 밀양강변길 여행을 시작하였다..

 

 

 

조선시대 때부터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명루(名樓)로 일컬어지고 있는 보물 제 147호인 "밀양 영남루(嶺南樓)"(자세한 설명은 아래사진 참조)

 

 

 

영남루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이층누각 팔작지붕으로 기둥이 높고 기둥 사이 간격이 넓어 더욱 웅장해 보인다.

영남루 본루 앞면, 바라보아 왼쪽에 嶠南名樓(교남명루)에서 교남은 문경새재 이남이란 뜻으로. 곧 영남지방을 말하며,

오른쪽에 쓴 江左雄府(낙동강 왼쪽의 아름다운 고을)라 쓴 편액이 걸려있다. 귤산 이유원의 필체라고 기록되어 있다..

 

 

 

 

영남루각에서 바라다 본 밀양강 주변 풍경(위 아래 사진)

영남루 야경(夜景)은 밀양 8경중 하나이며...사진속에 보이는 밀양강을 끌어안은 풍광은 아름다움 그자체로

누각의 처마 끝은 눈을 감으면 시(詩)한수에 풍류를 즐겼을 성현들의 즐거움이 배여 있는듯.....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영남루 전면에 세워진 "만덕문"을 지나서 안쪽으로 들어가면 천진궁이 나타난다

종합해 보면 이곳 만덕분은 천진궁의 정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천진궁(天眞宮)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7호)

조선 현종 6년(1665)에 처음 건립하였으며 본디 이 건물은 역대 왕조 시조의 위패를 모신 拱振館의 부속 건물로 사용하다가 경종

2년(1772)부터 공진관을 대신해 위패를 봉안하여 객사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 헌병대가 역대 시조의 위패를

땅에 묻고 건물을 감옥으로 쓰기도 하였다.

 

천진궁은 남쪽을 향해 중앙에 단군의 영정과 위패를, 그 왼쪽 벽에 부여, 고구려, 가야의 시조 왕과 고려 태조의 위패를, 오른쪽

벽에는 신라, 백제의 시조 왕과 발해 고왕, 조선 태조의 위패를 각각 모셨다.

1957년 대종교 산하단체인 단군봉안회에서 건물의 이름을 천진궁이라 하고 정문을 만덕문이라 하였다. 이후 매년 음력 3월 15일 御天大祭,

음력 10월 3일 開天大祭를 지낸다. 천진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주심포식 건물로 대리석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높은 기둥을

세웠다.(인도행 카페에서....)

 

 

천진궁 바로 옆에 세워진 "단군 할아버지 석상"

오늘이 마침 단군 할아버지가 나라를 세우신 개천절이라 우리 일행이 이곳을 찾았던 의미가 있는듯 하다..

 

 

 

천진궁옆 오른쪽 언덕에 밀양에서 태어난 작곡가 박시춘 선생의 옛집이 보인다. (아래사진 참조)

 

 

 

이곳 흉상 왼쪽에 이분이 작곡한 노래 "애수의 소야곡" 노래비가 세워져 있었으며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고인의 옛집은 방 한칸에 부엌 한칸으로 그야말로 단출한 모습이였다.

 

 

 

 

영남루 왼쪽에 무봉사(舞鳳寺) 사찰을 일행이 찾아가고 있다.

무봉사(舞鳳寺)는 밀양강을 굽어 강 언덕에 우뚝 솟은 영남루와의 조화로 그림같은 풍경을 지닌 운치있는 사찰로 신라 제36대

혜공왕 9년(773)에 法照선사가 蘇寒山 영남사에 주석하던 중 하루는 하늘 나라 큰 봉황새가 춤을 추며 이 절터에 내려앉는지라

대중이 상서라 하여 환희하며 큰 선사를 받들어 모셨는데 마침 혜공왕이 영남사에 참배하였다가 선사의 법문에 개심하여 법은을

갚고자 하여 암자를 지어 무봉암이라 하고 산 이름을 무봉산이라 하였다

 

조선 선조 25년(1592) 조일전쟁으로 이 사찰이 불타자 선조 38년(1605) 慧澄선사가 법당, 칠성각, 수월루, 요사를 중창하였다.

현대에 와서 허물어진 법당과 요사를 중창하고, 범종 2,500근을 조성하여 밀양 8경의 하나인 ‘무봉암 晩鐘’을 갖추었다.

1991년 법당 7칸과 요사 5칸을 중창, 종각, 일주문, 대문 등을 창건하고 5층석탑, 무봉사 사적비를 세웠다.

현재는 통도사의 포교당이다.(인도행 카페에서...)

 

 

 

무봉사 대웅전정면 7칸, 측면 2칸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대웅전 내부에는 보물 제 493호인 석조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신중단, 지장보살, 대세지보살, 독성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영남루 아래에 자리한 아랑사(阿嫏祠)를 찾아가는 길이다..

아랑사는 죽음으로 순결을 지킨 아랑 전설의 주인공인 아랑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아랑사(阿嫏祠)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6호)

조선 명종(1545~1567 재위) 때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여 마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혼백을 위로했다고 전하지만 자세한 사실은

알 수 없다. 1930년 영남루를 중수하면서 "정순아랑지비"라는 비를 세우고 비각을 지어 아랑사라 하였다.

지금의 아랑사는 1965년 낡은 비각을 헐고 그 자리에 3칸짜리 사당과 삼문의 정문을 다시 지었다. 매년4월 16일 아랑제를 지낸다. 

 

아랑의 성은 尹, 이름은 東玉 또는 貞玉이다. 그녀의 아버지가 밀양 태수로 부임하였을 때 함께 밀양에 왔다.

밀양 고을 통인 白哥와 유모의 음모 빠져 아랑은 어느날 영남루의 야경을 보러 갔다가 통인 백가에게 욕을 당하게 되었다. 그것은 

아랑이 영남루에서 달구경을 하고 있을 때 유모는 별안간 없어지고 백가가 숨어있던 기둥 뒤로 뛰어나와서 아랑에게 사모의 정을 

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랑은 물론 거절하였다. 백가는 아랑의 가슴을 쥐었으므로 아랑은 더렵혀진 유방을 칼로 잘라버렸다.

백가는 맹렬히 위협하였으므로 싸움이 시작되어 마침내 아랑은 백가의 칼에 죽게 되고 그 시체는 강안의 대숲 속에 던져졌다.

 

다음날 아랑의 아버지는 여러 가지로 조사하였으나 알지 못하고, 필경은 자기 딸이 야간에 도망하였다고 믿게 되어 양반의 가문에

그런 불상사가 난 이상 근신하지 아니할 수 없다하여 사직하고 서울 본가로 가버렸다.

 

그뒤 새로 태수가 부임할 때 마다 부임 첫날밤에 귀신이 나타나고, 신관은 몸에 상처 하나 없이 죽어버렸다.

이로 인하여 밀양 태수를 원하는 자가 없으므로 조정에서는 자원자를 구하게 되어 李上舍란 사람이 자진 부임하게 되었다.

이상사는 부임 첫날밤 관사에 촛불을 밝히고 독서를 하고 있었다. 이때 별안간 음풍이 일어나서 닫았던 문이 저절로 열리고 산발

하고 유방에서 피를 떨어뜨리는 여인이 목에 칼을 꽂은 채 태수의 앞에 나타났다. 여인의 호소로 관청 소속의 백가가 한 짓임을

알고 태수가 백가를 잡아 아랑의 원한을 풀어주었다. 아랑이 나비가 되어 죄인을 지명하였다는 이 설화는 <靑邱野談>, 제1권,

雪幽寃夫人識朱旗 조에도 실려 있는데, 통인이 朱旗란 구체적인 이름으로 나타난다.

 

윤정옥이란 처녀가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 밀양에 있던 중 통인의 마수에 걸려 피살된 것은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원귀로 나타나 신관 사또를 죽게 하는 등 일련의 사건은 물론 후세 사람들이 만든 이야기다.

 

이런 유형의 설화는 우리나라 각 지방에 분포되어 있고 중국에도 있다. 대개 관청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며, 억울하게 죽은 여인은

관기였다. 아랑이란 구체적인 이름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아랑 설화가 대표적이다. 그래서 이런 유형의 설화를 아랑형 설화라 한다. 

손진태, <한국민족설화의 연구>, 을유문화사, 1984년판, 39~50쪽의 내용을 요약함.(인도행 카페에서 옮김) 

 

 

아랑사(阿嫏祠)에 봉안한 아랑의 영정은 以堂 金殷鎬(1892~1979)가 그렸으며

아래 그림은 밀양 태수로 새로 부임한 이상사가 아랑을 범한 백가를 찾아내어 취조하는 형상을 그림으로 그려 걸어두었다..

 

 

 

 

사명대사 동상(四溟大師 銅像)

영남루에서 북쪽으로 밀양읍성을 찾아가는 길에 세워진 사명대사 동상으로 임진왜란때 승려로서 국난을 극복한 사명당 송운대사

(松雲大師 1544 ~ 1610)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1971년 4월 25일 동상을 건립하였다 한다

사명대사는 1544년 밀양시 무안면 고나리에서 태어났으며, 명종 16년(1561)에 선과(禪科)에 급재하고 선조8년(1575)에 묘향산에

들어가 서산대사로 부터 선종을 강론받고 크게 깨달음을 얻는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을 모집하여 순안에

가서 서산대사의 휘하에서 활약하였고 서산대사의 뒤를 이어 승군을 통솔하였다.(동상옆 표지판에서 옮김)

 

 

 

사명대사 동상을 지나 10여분쯤 오르니

위 사진에서 처럼 경상남도 기념물 제 167호인 "밀양읍성"이 나타난다.(아래사진의 밀양읍성 설명 참조)

 

 

 

밀양읍성 가장 높은 곳에 무봉대(舞鳳臺)가 있다.

무봉대는 망루이면서 정자이기도 하다. 밀양읍성이 있는 이 산은 衙東山이다. 밀양 관청의 동쪽 산이란 뜻이다.

 

 

 

 

밀양읍성을 벋어나 작은차도를 건너 한적한 밀양의 농촌풍경을 바라보며 길을 걷는다.

이곳 밀양에도 단감이 유명하다고 하더니 군데군데 노랗게 단감이 주렁주렁 열려서 지나가는 길손을 반기고 있다. 

 

 

 

 

길 한가운데 커다란 모과나무를 지나서

"추화산(243m)" 정상을 찾아가는 산길 중간에 일행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아래 사진)

 

 

 

추화산은 밀양시 해발 243m의 산으로 밀양읍성으로부터 동쪽으로 약 2㎞지점에 있다.

추화산성은 신라가 가야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던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삼국시대 초기의 산성터로 추정된다.

성의 둘레는 1430m이고, 성의 구조는 동, 서, 남에 문터가 있고 북쪽 계곡의 평지에는 우물, 연못 부속건물들이 있었던 것 같다.

추화산 서, 북부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는데 적의 침입이 있을 때에는 군사적 고지이면서, 주변의 주민과 군사들에게 적의 침입을

알리는 기능을 하였던 곳이었다.


성안에서 기와 조각, 토기 조각, 분청자기·백자조각들이 발견되었는데, 추화산성은 처음에는 읍성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많으나,

읍성이 현재의 밀양시내에 쌓아지면서 산성으로서 기능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자료: 문화재청)

 

 

추화산 정상에 도착하였다.

이번 밀양 강변길 걷기 여행중 가장 힘든 코스를 걸어온듯 하다, 일행은 이곳에서 점심을 해결하였다.

 

 

 

추화산 정상에 세워진 "추화산 봉수대" 전경

봉수는 변방 국경의 긴급한 상황을 중앙 또는 변경의 기지에 알리는 군사상의 목적으로 설치된 통신수단이다.

봉수대는 밤에는 횃불(烽), 낮에는 연기(煙)로서 신호하여 의사를 전달하는것으로 이곳 밀양에는 1654년에 신설된 백산봉수를

제외한 남산봉수, 추화산봉수, 분항산봉수는 봉수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전한다

 

 

 

추화산봉수대를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담았다.

나는 사진속에 회원들과는 오늘 처음 만났지만...이분들은 매주 이렇게 모여 산길, 들길과 마을길을 걸으며 친목을 다지고 있으니

서로간에 유대가 돈독하여 회원상호간에 이질감 없이 서로 이끌어주고 밀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게 왠지 부럽기도 하였다.

(앞쪽에서 둘번째줄 오른쪽에서 3번째 남정네 파란모자의 부산갈매기 모습)

 

 

추화산 정상에서 밀양시내를 흐르는 밀양강의 모습을 담았다.(위 사진)

 

 

 

추화산 중턱에 영천암을 뒤로하고 마을로 내려와서 "불루베리 농장"을 경유하여 "긴늪유원지(기회송림)"에 도착하였다.

긴늪유원지는 사유지라 입장료(1인당 1,000원)을 지불해야 이곳에 들어가서 울창한 송림을 구경할수 있다고 한다..

단체입장으로 약간의 할인 혜택까지 받아서 이곳에 입장하여 소나무 그늘에 앉아서 잠시 휴식을 취할수가 있었다..

 

 

 

국내영화 "밀양" 촬영 중...

이곳 송림에서 중요한 장면을 찍었다는 내용의 간판이 세워져 있다.

 

 

 

 

긴늪유원지의 송림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밀양시 교동에 자리한 "오연정(鼇淵亭)"에 도착하였다.

(오연정과 관련된 설명은 아래사진 참조)

 

 

오연정(자라오鼇, 못연淵, 정자亭)...뜻을 해석하면 "자라가 사는 연못이 있는 정자"라는 뜻이니

건축물 한켠에 조그마한 연못이 있었는데...연못앞에 "鼇淵"이란 석축이 세워져 있었으며(아래사진속에 보임) 

또한 이곳 근처에 소나무와 몇백년은 됨직한 카다란 은행나무가 대여섯 그루쯤 자생하고 있었다.

 

 

 

 

오연정 구경을 마치고 용평터널을 찾아가는 길에 방금 지나온 "긴늪유원지(기회송림)"의 모습을 담았다.

위 사진에서 처럼 밀양강을 사이에 두고 길다란 송림지대가 펼쳐진 모습이 파란 가을하늘과 조화를 이룬 모습이다.

 

 

 

용평터널에 도착하였다.

가을이라고 하지만 밀양의 한낮 기온은 제법 높았는데...이곳 터널에 들어오니 시원한 그늘과 함께 선선한 가을바람이 분다.

터널의 넓이는 자동차 한대가 겨우 지나갈수 있는 넓이였다.(일행이 걷고 있는데...실제 자동차가 이곳 터널을 지나갔다) 

 

 

 

 

터널을 지나 위쪽을 처다보면 밀양 8경중 하나인 "월연정(月淵亭)" 가는길이 보인다

(월연정에 관한 설명은 아래사진 참조)

 

 

 

 

 

 

 

월연정 근처에 흰소나무(백송 白松) 한그루가 서있다.(위 사진)

이곳의 백송은 천연기념물 제16호였다가 최근에 해제 되었단다. 왜 그랬을까?

일전에 충남 예산에서 보았던 백송보다 더 하얀색을 띄고 있으니....어찌 소나무가 흰색일까 묘한 조화로다....

 

 

 

길 왼편에 유유히 흐르는 밀양강을 끼고 무더운 가을날씨에 쉼없이 걸었다.

위 사진속 오른쪽에 우리가 일행이 걸어야할 파란색의 "활성교(橋)" 교각이 보인다,

 

 

 

지도상엔 용호정이라고 나와 있는데 실제론 심경루(心鏡樓)라는 정자가 있다.

덥고 힘들어서 잠시 쉬어가려고 정자를 찾아 갔지만 입구가 잠겨있어 아쉽게 발길을 돌렸다.

 

 

 

활성교 교각위에서 밀양강을 배경으로 사진을 담았다.

강변에 많은 강태공들이 망중한을 즐기고 있었으며, 우리는 사진속 왼편길을 따라 걸었다.

 

 

 

 

활성교를 지나서 밀양강을 오른쪽에 끼고 산길을 걷는다

이곳 산길 입구에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 228호인 "금시당(今是堂)"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위 사진) 

허나 유감스럽게도 출입문이 잠겨있어 구경할수 없었던게 안타깝다...금시당 이광진(李光軫 1513~1566) 선생은 조선조

명종때 승지로서 학행이 높은 선생으로 만년에 은퇴하여 학문을 딱고 수양을 하기 위해 명종 21년(1566)에 창건한 별업(別業)의

정당(正堂)이였다. 이 고택 정원안에는 선생이 손수 심은 440년 수령의 은행나무가 있어 밀양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단다...

 

 

 

 

부산 대구간 신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교각 아래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오른쪽으로 밀양강을 끼고 걷는 길이 무척 쾌적하다. 일행은 나지막한 산 3개를 오르내리고,

땡볕에 산길과 포장길을 걸었으니 많이 지쳤을 것인데도 아무도 투덜대는 분이 없이 묵묵히 잘따라 걷는다.

 

 

 

우리 일행이 지나온 길을 위 사진속에서 본다,

사진 왼편에서 오른쪽으로 걸었으니 모두가 지쳐서 힘들어 한다..

 

 

오후 4시 20분, 용두산(72.8m)입구에 팔각정 앞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용두산까지는 550m거리다..

 

처음 계획대로 용두산과 용두교와 밀양초교를 경유하여 처음 출발지점인 밀양교로 가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초과되어

이곳 팔각정에서 밀양역 방향으로 하산하기로 하였다. 

 

 

 

용두산 입구 팔각정에 삼거리 입구로 하산하여 10여분쯤 걸으니

위 사진속 이정표에서 보듯이 밀양역이 200m거리에 있다는 표지판이 보인다..

 

 

 

 

오후 4시 50분 밀양역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기차편를 이용하여 각자 부산으로 향하였다.

밀양 여행지에 출발할때도 그리고 여행을 마치고 부산으로 되돌아 올때도 각자 기차를 이용하니 즐거움이 더하는듯....

 

돌이켜보니 풍성한 가을만큼 즐거운 하루를 보낸듯 하다, 노랗게 익어가는 감, 대추, 가을걷이를 기다리는 들녘의 나락과

울긋불긋 곱게 핀 코스모스, 길가에서 말리는 씨옥수수, 강가에 핀 억새꽃, 시골집 담장너머로 보였던 석류와 무화과 열매 등

처음 함께 하였지만 많은 사랑을 주셨으니 다음 인도행에서 만날것을 약속하고 아쉽게 헤여졌지만 즐거움은 가득하였다.

 

이번 여행에서 많은 도움을 주셨던 달마루님, 같은 동네에 산다고 기차 여행에 함께 동행하며 챙겨주신 동녘님, 물찬제비님,

그리고 점심을 함께한 자갈치님에게도 감사를 드리며....다음번 인도행 여행에 함께 할것을 약속합니다....감사합니다

 

 

 

                밀양 아리랑

 

  

  - 날조보소 날좀보소 날좀보소 동지섣달 꽃본듯이 날좀보소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영남루 명승을 찾아가니 아랑의 애화가 전해있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정든님이 오시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물고 입만 방긋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 저건너 대숲은 의의한데 아랑의 설은넋이 애달프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채색으로 단청된 아랑각은 아랑의 유혼이 깃들여 있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영남루 빛인달빛 교교한데 남천강 말없이 흘러만간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 송림속에 우는새 처량도하다 아랑의 원혼을 네설워 우느냐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봄고개 여름고개 가을고개 바람불고 눈날리는 겨울고개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남천강 굽이쳐서 영남루를 감돌고 벽공에 걸린달은 아랑각을 비치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 아랑의 굳은절개 죽엄으로 씻었고 고결한 높은지조 천추에 빛난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담넘어 갈적엔 문고리 잡고 내집에 올때는 발발떤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팔각정인 영남루 웅장한모습 반공에 우뚝서 기관을 자랑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 영남루 남천각 아랑각은 영남의 명승인 밀양의 자랑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달밤에 홀로일어 영남루에 오르니 어디서 부는퉁소 내마음을 설레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갸냘픈 아랑의 고운태도 죽어도 강혼이 남아있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