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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장거리 여행

충남 부여군 부소산성(扶蘇山城), 궁남지(宮南池) 여행

by 삼도갈매기 2012. 10. 24.

 

 

 

충남 공주시 공산성과 마곡사 답사여행을 마치고

유유자적 일행과 함께 백제의 전통과 혼이 살아 숨쉬는 부여군 부소산성에 도착하였다.

 

 

 

- 부여 부소산성(扶蘇山城) 답사

 

부소산성 안에는 낙화암에서 꽃잎처럼 떨어져 죽은 백제 여인들의 충절을 기리는 "궁녀사", 백제말 3충신 성충, 흥수, 계백의 구국 충절을 기리는 "삼충사", 부소산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사자루", 떠오르는 아침해를 맞이하며 하루의 국정을 계획하고 백성들의 평안을 기원했던 "영일루" 등 백제인의 충절과 혼이 어린 역사적 명소가 곳곳에 산재해 있는 곳이다.

 

 

 

부소산성(扶蘇山城)     

부여의 진산으로 해발 100m밖에 되지 않는 나지막한 구릉으로 왕궁과 시가를 방비하는 최후의 보루였다.

산성이 완성된 것은 성왕 538년에 수도를 사비로 옮기던 무렵으로 보이나 그보다 앞서 500년쯤에 이미 선왕인 동성왕이 산봉우리에

산성을 쌓았고, 후대에 무왕이 605년에 고쳐 다시 쌓았다 전한다. 성벽의 축조방식은 흙과 돌을 섞어 다진 토성혼축식이며. 경사면에 흙을 다진 축대를 쌓아 더욱 가파른 효과를 낸 성곽이 2,200m에 걸쳐 부소산을 감싸고 있다.(사적 제5호).  

 

 

 

일행과 함께 부소산성에 입장하여 여러유적을 찾아나섰다.

이곳 부소산성도 가을을 왔음을 알리는 고운 단풍이 길손을 반갑게 맞이한다..

 

 

위 사진의 의열문(義烈門)을 지나면 아래사진의 삼충사(三忠祠) 사당이 보인다(문화재자료 제 115호)

삼충사는 백제의 충신인 성충(成忠 ?~656), 흥수(興首 ?~?), 계백(階伯 ?~660)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57년에 세운 사당이다.

 

성충은 백제 의자왕때 좌평으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위해 애쓰다가 투옥되어 식음을 전폐하고 죽은 충신이다.

흥수는 나당연합군이 공격해오자 탄현(炭峴)을 지키라고 의자왕에게 간곡히 당부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계백은 신라 김유신 장군의 5만군이 황산벌로 쳐들어오자 5천 결사대로 싸우다 황산벌에서 장렬히 죽은 장군이다.

 

 

 

이곳에서도 이고장 출신이 문화해설사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이곳 부소산성의 문화유적지를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작자미상이라는 "부여"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어릴때 위 시비로 노래를 부르던 기억이 있는데.....나는 왜 이 시를 지금도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사비루(泗批樓, 충남문화재자료 제 99호)

부소산성에서 제일 높은 자리(106m)로, 원래 달구경을 했다는 송월대가 있었던 곳이다. 1919년 임천면의 문루였던 개산루를 이곳에 옮겨 지으면서 사비루라 이름하였다. 사비루의 현판 글씨는 조선말 의친왕 이강공이 쓴 것이며 당시에는 사자루라 현판하여 사자루와 사비루는 병용되서 쓰이고 있다. 사방이 트여있어 부여주변의 풍경을 즐길 수 있는 누각이다.

 

 

 

부소산성 입구에서 이곳 이정표까지 30여분 걸었다.

금강 줄기인 백마강에서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어오지만 이마와 등어리엔 땀이 흥건히 고인다..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20m쯤에 낙화암과 백화정이 있고, 오른쪽엔 고란사와 백마강 유람선을 탈수 있는 선착장에 다다른다..

길 왼쪽으로 발길을 돌려 백화정과 낙화암을 먼저 답사하기로 하였다.

 

 

백화정(百花亭) 앞에 커다란 소나무 한그루가 서있으며 사진처럼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낙화암 천년송 ; 남부여국 사비성에 뿌리내렸네/ 칠백년 백제역사 오롯이 숨쉬는 곳/

낙화암 절벽위에 떨어져 움튼 생명/ 비바람 눈서리 다 머금고/ 백마강 너와 함께 천년을 보냈구나/

세월도 잊은 그 빛갈 늘 푸르름은/ 님 향한 일편단심 궁녀들의 혼이련가/ 백화정 찾은 길손 천년송 그마음.

 

 

백화정(百花亭, 충남문화재자료 제108호)

부여 부소산성 북쪽 금강변의 낙화암 정상부에 있는 육각의 정자건물이다. 백화정이란 이름은 중국 소동파가 해주에 귀향가 있을때

성 밖의 서호를 보고 지은 강금수사백화주(江錦水樹百花州)라는 시에서 취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부여 외곽을 감싸고 도는 백마강과 주변의 낮은 산들이 어울려 내려다보이는 풍광이 아주 일품이어서 마치 한 폭의 산수화를 대하는 듯하여 부여를 찾는 관광객이면 반드시 들리는 명소이기도 하다.

 

백마강을 시원하게 내려다볼 수 있는 육모지붕의 백화정(百花亭)은 백제 멸망 당시 절벽에서 꽃잎처럼 떨어져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킨 백제 여인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서 세운 정자로 그 아래쪽에 낙화암이 있다.

 

 

백화정 현판과 육각정 내부의 아름다운 꽃을 배경으로 

함께 답사여행 중이신 "만고강산님"이 멋진 포즈를 취해주신다. 

 

 

낙화암(충남문화재자료 제 110호)

서기 660년 백제가 무너지던 날 백제 여인들이 충절을 지키기 위해 백마강에 몸을 던질 때의 모습을 꽃이 떨어지는 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백마강에서 바라보면 아직도 절벽 색깔이 붉은 것은 당시 백제 여인들이 흘린 피로 물들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때마침 백마강에 유람선이 떠가는 모습도 함께 보인다(아래사진)

 

 

 

고란사(皐蘭寺)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은 백제 궁녀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건립한 사찰로, 낙화암 아래 백마강가 절벽 밑에 자리하고 있다.

고란사 뒤편에 고란초가 자라는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고란약수와 백마강을 바라보는 주위 경관이 매우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다.

 

 

 

고란정(皐蘭井)

고란사 뒷편에 있는 고란정엔 고란약수가 솟아나고 있으며, 임금은 고란사 뒤편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고란약수를 드셨는데,

바위에서 자라는 고란초를 띄워오게 하여 고란약수임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고란수(皐蘭水,위 사진)와 고란초(皐蘭草, 아래사진)

고란초는 강가 절벽이나 산지의 그늘진 바위틈 등에서 자라는 소형의 식물로 고란사 뒤의 절벽에서 자라기 때문에 고란초라는 이름이 생겼다. 전설에 따르면 백제 임금이 항상 고란사 뒷편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약수를 애용하여 매일같이 사람을 보내 약수를 떠 오게 하였다. 이때 고란약수터 주변에서 자라는 기이한 풀이 있어 이름을 고란초라고 불렀는데, 약수를 떠오는 궁년들이 임금에게 바칠 물동이에 고란초 잎을 한두개씩 물 위에 띄워 옴으로서 고란약수라는 것을 증명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는 고란 약수를 한잔 마시면 삼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그 약수를 마시고 갓난아이가 된 할아버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위 아래사진 유유자적 카페에서 옮김)

 

 

 

고란사 아래에는 유람선을 탈수 있는 나루터가 있다.

아쉽게 이번 답사여행에는 유람선을 타는 코스가 없지만...이곳에서 유람선을 타고 삼천궁녀가

몸을 던졌다는 낙화암을 바라다보면서 백마강 유람선에 몸을 싣고 유유히 흐르는것도 무척 운치가 있다...

 

 

 

부여는 백제26대 성왕이 국가 증흥의 원대한 뜻을 품고 산수가 수려하며 생활여건이 풍요로운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긴 후

123년간 국력 신장과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쳐 고대문화를 꽃피웠고 충효, 개척 정신을 뿌리내린 역사문화의 고장이다.

2009년 6월 현재 인구 76,682명, 면적은 624.6㎢ 로 도내에서 공주시,서산시, 당진군.천안시에 이어 다섯번째로 넓은곳이다.

 

 

10년전 앨범을 뒤적거려서 백화정과 낙화암 그리고 고란사에 찍은 사진을 찾아 카메라에 담아 이곳에 옮겨보았다.

 

2002년 대전에서 직장생활때 아내와 이곳 부여 부소산성을 여행했으니... 그때는 백화정과 낙화암 그리고 고란사 여행을

마치고 고란사 아래에 있는 백마강 유람선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타고 강을 거슬러 오르면서 백화암의 우뚝솟은 절벽을 보며

그 옛날 백제 여인들의 절개를 직접 몸으로 느낄수도 있었는데, 이번엔 백마강 유람선을 탈수 없었던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대략 2시간의 부소산성 답사를 마치고 근처 궁남지로 이동하였다..

 

  

 

 


 

 

 

 

- 부여 궁남지(宮南池) 여행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연못인 궁남지에 도착하였다.

궁남지는 서동공원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삼국사기에 "백제 무왕 35년(AD 634) 궁의 남쪽에 못을 파 20여리 밖에서 물을 길어다

채우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못 한가운데 섬을 만들어 선인이 사는곳"을 상징한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보아 이 연못은 백제 무왕때 만든 왕궁의 정원이였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시기에 만든것으로 삼국중에서도 백제가

정원을 꾸미는 기술이 뛰어났음을 알수 있는 인공연못이다.

 

 

궁남지(宮南池)

한여름에 찾아왔더라면 아름다운 연꽃에 흠뻑 빠졌을텐데....

선선한 가을에 찾아왔더니 위 사진에서 처럼 시든 연꽃이 한가득하다.

 

궁남지는 백제무왕과 선화공주 이야기가 전해진다. 무왕의 부왕인 법왕(法王)의 시녀였던 여인이 연못가에서 홀로 살다가

용신(龍神)과 통하여 아들을 얻었는데, 그아이가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인 선화공주와 결혼한 서동이며, 아들이 없던 법왕의

뒤를 이은 무왕이 바로 서동이라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전체적으로 둥근 연못 가운데에 작은 섬이 있고 못가에는 버드나무가 한가롭게 가지를 휘늘이고 있다.

연못 동쪽에서 주춧돌이 발견되고 기와 조각이 흩어져 나와 이 궁남지가 궁성의 이궁에 따르는 원지(苑池)였던 것으로 

주춧돌이 별궁 건물의 흔적이 아닐까 추측된다고 한다.

 

 

634년에 만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인공연못으로 연못 가운데 있는 포룡정이라는 정자까지 나무다리가 놓여 있다.

백제는 삼국 가운데 조원 기술이 가장 뛰어나 노자공이라는 백제 사람은 일본 황궁의 정원을 꾸며 아스카시대 정원사의 시조가

되기도 했다고 전한다.

 

 

궁남지가 오늘 답사의 마지막 코스라서 해가지기 시작한다..

카메라가 좋았더라면 궁남지의 멋진 일몰장면을 담을수 있었을텐데...못내 아쉽다..

 

 

 

 

이곳을 다녀갔음을 알리는 인증샷을 궁남지 포룡정(抱龍亭) 앞에서 취해본다..

아래사진은 10여년전에 이곳 궁남지 포룡정 앞에서...그로부터 10년 후에 찾아 왔으니 감회가 새롭다.

 

 

 

 

궁남지에 대한 조사는 1990년부터 현재까지 9차에 걸쳐 수행되었으며 사비시대에 조성된 인공수로, 목조저수조, 우물터와

도로유구, 수정 경작지, 토기 가마터, 굴립주건물지 등 다양한 유구가 확인되었고, 6~7세기와 3~4세기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곳 외에도 공주에는 오늘 답사한 공산성과 마곡사 이외에 선사시대의 유물과 유적을 전시한 "석장리박물관"과 돌방무덤에 벽화가

그려져 있는 "송산리 고분군"과 "무령왕릉" 그리고 "국립공주박물관" 이 그옛날 백제의 도읍지였음을 알리고 있으며,

근처 부여군에도 오늘 답사한 부소산성과 궁남지 이외에도 국보 9호인 "정림사지"와 "국립부여박물관" 그리고 왕이나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백제왕릉원(능산리고분군)", "백제문화단지"등이 곳곳에 산재해 있음을 알수 있다.

 

오후 6시에 모든 일정을 마치고 80여명의 일행과 함께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귀가하는 차량에서 저녁식사 대용으로 도토리 안주에 시원한 막걸리 파티도 이번 여행을 즐겁게 했다...

밤 10시쯤 부산에 무사히 도착하였으니, 깊어가는 가을에 충남 공주, 부여 답사여행으로 즐거운 하루를 보낸듯 하다...

 

추억의 계절 가을이 왔습니다, 가을 여자는 멀리 떠나기를 원하고, 가을남자는 외롭다 보니누군가 곁에 있어 주길 원한다 합니다.

외로운 가을 남자는...후미진 골목의 어느 선술집에서 그리고 단풍이 곱게 물들었던 어느해 가을 산기슭에서 남몰래 흘렸던 

장미의 눈물을 기억하며 마음속 꼭꼭 숨겨둔 지도를 꺼내어 놓고 그때의 추억을 더듬으며 눈물 짓는다고 합니다...

마음속에 지도 잘못꺼내 놓다가 아내에게 들키면 박살이야 나겠지만, 그래도 이 가을에 한번쯤 꺼내서 딜다보며 추억에 잠시

잠기시는 것도 좋을듯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