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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장거리 여행

경북 청도군 영남알프스 둘레길(제 6구간)을 걷다

by 삼도갈매기 2013. 2. 17.

 

 

 

 

2013년 2월 16일(토요일)

27명의 인도행님과 함께 경상남도 청도군 금천면 오봉리 ~ 청도군 운문면 운문사까지 영남 알프스 둘레길 제6구간을 걸었다.

 

오전 8;30분 부산을 출발, 10;30분 청도군 금천면 오봉리 삼거리에 도착, 도보를 시작하였다. 

이번 도보는 인도행님들과 2012년 11월 24일 실시한 영남알프스 둘레길 제 5구간 종점(오봉 삼거리)에서 시작

오봉리 - 대비사 삼거리 - 대비사(중식) - 대비사 뒷산(옛길) - 운문사 - 운문사 매표소까지 10Km 거리를 5시간 30분 걸었다.

 

 

 

도보중 대비사(寺)를 찾아가는 길

커다란 연못인 "대비지(池)" 앞에서 단체사진(27명)을 담았다....(인도행 카페에서 옮김)

 

 

 

작년 11월 24일 영남 알프스 둘레길 제 5구간 도보를 마치면서

인생길 따라 도보여행(인도행) 앰블램을 펼치고 단체사진을 찍었던 모습(그땐 44명이였는데 오늘은 27명이다)

 

 

 

(10;30분)경남 청도군 금천면 오봉삼거리에 도착

길잡이 백일봉님의 간단한 주의사항과 함께 도보를 시작하였다.

 

 

 

출발점인 오봉삼거리에서 10여분 거리에 있는 오봉리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차도지만 시골길이라 차량출입이 뜸해 차도를 걷는데 별로 불편함이 없었다.

 

 

 

 

 

청도군 금천면 박곡리에 자리한 보물 제 203호

"청도박곡조석가여래좌상(淸道珀谷洞石造釋迦如來坐像)"에 도착하였다.

 

 

 

작은 시골마을에 통일 신라시대에 세워졌다는 석탑과 불상이

이렇게 오랜세월동안 보존되어 있다는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아쉽다면 관리상태가 양호치 못함이다.

 

 

 

입구 표지판의 설명서를 옮겨본다

석가여래는 전시대를 통하여 예배의 대상이 되었고, 이 불상 또한 마을주민들이 따로 불각(佛閣)을 세워 모시고 있다.

1928년에 일어난 큰 불 때문에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는 물론 불신(佛身)까지 손상을 입었다.

얼굴의 구체적인 모습은 알 수 없으나 온화하면서도 풍만한 인상이다. 목에는 3줄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어깨는 힘차 보이고 가슴은 매우 풍만하지만 그에 비해 허리는 잘록하게 표현되었다. 불상이 입고 있는 옷은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있는데, 몸에 밀착되었고 옷주름도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다.(불상 높이 276Cm) 

이 불상은 비록 손상은 입었지만 석굴암(국보 제24호) 본존불과 양식이 비슷하며, 당당하면서도 세련된 통일신라 전성기의 석불상

으로 높이 평가된다.

 

 

11;40분경 대비지(大悲池)에 도착하였다.

이곳이 풍요로운 농촌임을 증명하듯...농사에 필요한 아담한 호수가 조성되어 있다. 

 

 

 

겨울에도 박곡저수지가 이렇게 아름다운데....

푸르름이 절정인 한여름엔 얼마나 아름다울까.....여름에 다시 와야할까 보다.

도보에 참여한 일행중 는개님이 "햇볕에 반짝이는 은빛 물결이 우리말로 "윤슬"라고 알려준다, 윤슬...정말 멋진 단어다.

 

 

 

 

12;00경 대비사(大悲寺)삼거리에 도착하였다.

길 오른쪽으로 가면 천년고찰 대비사가 자리하고 있으며,

길 왼편엔 영남 알프스로 유명한 청도 운문산, 가지산, 억산 등의 등산 초입길인 듯....

 

 

 

 

 

청도 대비사 대웅전((淸道 大悲寺 大雄殿) 보물 제 834호

대비사는 신라 진흥왕 27년(566)에 신승이 세우고 진평왕 22년(600)에 원광국사가 보수했다. 고려시대 이전에는 박곡리 마을에

있었으나 고려시대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왔다.

석가모니불상을 모시고 있는 대웅전은 16세기 경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전체 구성이 짜임새가 있고,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의 구성도 

꼼꼼하고 튼튼하며, 이를 이루는 세부 부재들의 형태를 보아 조선 초기의 건축 수법을 볼 수 있어, 대체로 조선 초기에서 중기에

걸친 양식 특징을 살필 수 있는 건축물이다.(대웅전앞 표지판에서 옮김)

 

 

 

대비사찰 중앙에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요사채가 세워져 있으며

한겨울이라 신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넓은 주차장이 있어 이곳이 영험한 사찰임을 말해준다.

 

 

 

경북 청도의 대비사(大悲寺)는 567년(신라 진흥왕 28)에 창건되었는데, 창건주의 이름은 알 수 없고 단지 한 ‘신승(神僧)’이라고만

알려져 있다. 창건 당시에는 소작갑사(小鵲岬寺)라고 하였다. 창건 설화를 보면 557년 한 신승이 운문산에 들어와 현재의 금수동

(金水洞) 북대암(北臺庵) 자리에 초암을 짓고 수도하였다.

3년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산과 계곡이 진동하여 새와 짐승들이 놀라 울었다. 신승은 이 때 이 산에 오령(五靈)이 살고 있음을 알고

7년에 걸쳐 5개의 사찰을 지었다. 산 중앙에는 대작갑사(大鵲岬寺), 동쪽에는 가슬갑사(嘉瑟岬寺), 남쪽에는 천문갑사(天門岬寺),

서쪽에는 소작갑사, 북쪽에는 소보갑사(所寶岬寺)를 각각 지었던 것이다. 이 중 대작갑사가 지금의 운문사(雲門寺)이다.

진평왕 22년(600)에 원광국사가 고쳐지었다.

이 절은 고려시대 이전에는 박곡리 마을에 있었으나 고려시대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사찰 입구 표지판에서 옮김)

 

 

 

 

천년고찰이니...조용하게 인증샷을 남겼다.

대비사 좌측 냇물이 흐르는 곳에서 일행과 함께 중식을 해결하였다.(위 아래사진 카페에서 옮김)

 

 

 

 

"천진교(天眞橋)"를 건너서.....

인근 천연바위에 조성된 천진보탑(天眞寶塔) 을 찾아간다......

 

 

 

부도전 앞 천연바위에 조성된 천진보탑(天眞寶塔)


천진보탑이란? 

계룡산 내에 봉우리처럼 우뚝 솟아있는 자연바위로,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탑이다.

탑이란 원래 부처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을 일컫는 것으로,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갑사(甲寺)의 산내암자 신흥암(新興庵)에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신흥암 천진보탑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있다고 전해지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석가모니가 열반한 후 인도의 아육왕은 구시나가라국에 있는 사리탑에서 많은 양의 사리를 발견하여 이를 시방세계(十方世界)에

나누어 주었다. 그 때 4천왕(四天王) 가운데 북쪽을 담당하던 비사문천왕(毘沙門天王,다문천왕을 말함)을 이곳 계룡산에 보내어

이 바위 안에 담아 두도록 하였고, 뒷날 아도화상이 이를 발견하여 천진보탑(天眞寶塔)이라 이름 붙여 놓았다고 한다.

대비사 천진보탑 점안식이 2010년 11월 7일에 있었다. 이 부도전(浮屠田)에는 부도 16기와 비석 6기가 있다.(근처 표지석에서 옮김)

 

 

 

오붓하게 모여 중식을 해결하고

대비사 사찰과 천진보탑 탐방을 마치고 석재 체취로 산허리가 파헤쳐진 산을 넘어 천년옛길을 찾아간다.

 

 

 

가파른 산길 중턱...예전 근처 주민들이 다녔다는 천년옛길 입구에 도착

산행길잡이 "백일봉님"의 설명을 경청하고 있는 인도행님들의 모습이 진지하다.

 

 

 

근래엔 사람이 다니지 않고 산짐승이 다녔을것 같은 낙엽이 수북하게 쌓인 옛길을 걷는다

얼마나 가파른지 길가에 박힌 돌이 아래로 굴러가면 쉼없이 끝도 없이 굴러가는 모습을 볼수 있다.

 

 

 

천년 옛길...20여분을 걸어서 산 정상에 도착했다.(일행중 소정네님 스마트폰으로 확인하니 고도 404m)

오전까지 편한 길이였다면, 점심식사를 마치고 이곳까지가 아주 가파른 길이였다.

이마에 땀이 맺히고 힘들지만, 오히려 상쾌한 기분이다....여기서 부터는 내리막 길이다.

 

 

 

청도 운문사 사찰입구가 보이는 곳에 도착. 전면 소나무 숲에 매표소가 있다.

함께 걷는 "푸른불루님"이 앞에 보이는 산이 지룡산(659m)라 설명해 주신다, 산세가 멋질 듯....

 

 

매표소를 거치지 않고 논길을 걸어 운문사로 향했다.

1인당 입장료 2,000원으로 계산해도(27명 * 2,000원) 54,000원을 절약했단다.....ㅋ

 

 

 

 

운문사 사찰입구에서 목을 축이며 잠시 휴식을 취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

신라 진흥왕 21년에 한 신승이 창건하였다고 하는 사찰로 승가대학(1958년) 그리고 비구니로 유명한 "호거산운문사"

 

 

 

 

운문사 사찰경내에 천연기념물 제 180호인 "처진소나무" 앞에서 단체사진을 담았다.(위 아래사진 카페에서 옮김)

 

가지가 밑으로 늘어지는 점이 보통 소나무와 다른데 아래로 둥글게 자라는 소나무는 매우 드물다.

나무모양이 아름답고 전형적인 쳐진소나무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생물학적 자료로서 가치가 크다.

어떤 고승이 나무가지를 꺽어서 심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쳐진소나무 높이는 6m, 둘레 3.5m)

 

 

 

 

 

운문사 사찰은 여러번 탐방한 기억이 있다....

올때마다 느끼는 것은 이곳 운문사에는 "대웅보전"이 두채가 있다는 것이다..

짐작컨데...위 대웅보전이 최근에 세워진 건축물이며, 내부엔 여러상의 불상이 자리하고 있다.

 

 

"법륜상(法輪相)" 앞에서

"법륜은 부처님의 교법이 수레가 굴러가듯 머물지 않고 항상 전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이하 생략)라고 쓰여있다.

 

 

 

 

운문사 삼층석탑

 

 

운문사 대웅보전(보물 제 385호)

조선 중기 사찰건물로 운문사의 불전이다. 운문사는 신라 진흥왕 21년(560)에 세워진 이후로 여러 차례 보수되었는데, 대웅보전을

포함한 현재의 건물들은 조선 숙종 44년(1718)에 고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오래된 대웅보전 건물) 


대웅보전은 석가모니 부처를 주존불로 모신 법당을 말하며, 비로전은 비로나자불을 주존불로 모신 법당을 말한다. 그리고 각 절마다

중심 법당인 대웅보전은 단 하나 뿐이다. 하지만 운문사는 다른 사찰과 달리 대웅보전 현판이 걸린 건물이 두 채 있다.

조선 숙종때 지어져 보물로 지정된 대웅보전과 1994년에 새로 지은 대웅보전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보물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비로나자불을 주존불로 모신 전각으로 원래는 비로전이다. 하지만 만세루 뒤에 있던 진짜 대웅보전 건물이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비로전을 대웅보전으로 고쳐 최근까지 사용해온 것이다. 1994년에 들어서야 비로소 원래의 자리에 대웅보전이 새로 지어져 현판을

걸고, 옛 비로전에도 제 이름을 되찾아 주려고 하였다. 하지만 문화재청과 합의를 하지 못해, 결국 운문사는 사찰 형식에 맞지 않게

대웅보전이란 이름의 법당을 두 채나 갖게 되었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장식 구조가 기둥위와 기둥 사이에 있는 다포 양식으로 지어졌고, 밑동은 굵고 위로 올라가면서 가늘어지는

민흘림 기둥을 사용하였다. 단청은 오색(五色)으로 갖은 무늬를 쓴 금단청(錦丹靑)이고, 천장 가운데는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꾸몄다...(아래사진은 대웅보전 내부모습)

 

 

 

오백전(五百殿)

오백전은 500아라한(阿羅漢) 성자를 모신 전각으로 원광국사(圓光國師)가 창건하고 보양국사(寶壤國師)가 중창 할 때부터 있었던

전각이라 한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숙종 10년(1105) 원응국사(圓應國師)가 중창한 건물이 지금의 취사 옆에 있었는데, 언제인가

허물어져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중건했다고 한다.(내부엔 아래사진 처럼 500개의 불상이 모셔져 있었다)

 

 

 

15;40분....운문사 탐방을 마치고 사찰입구 주자창으로 향하였다.

운문사 사찰 입구엔 멋진 소나무만 있는줄 알았더니 위 사진처럼 "솔바람 길"이란 글도 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흑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수타니 파타 경전 中에서 -

 

 

 

 

 

 

16;00경에 운문사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영남 알프스 제 6구간 길잡이 백일봉님 말씀대로 이 길을 걸으면서 복(福)을 지었다고 자평하는걸 보니 좋은길을 걸은듯....

원래 영남 알프스 둘레길이 제 7구간까지 있는데...7구간은 가파른 산길이라 인도행 격에 맞지않아 취소했다고 하신다..

많이 아쉽지만, 분명 인도행에서 몇년후에 나머지 구간인 제 7구간을 도보할것이라 예상하면서....

제 6구간을 마지막으로 영남 알프스 둘레길 막을 내린다....지금처럼 인도행님들과 좋은길을 많이 걷겠지만,

특히 동해안 해파랑길도 열심히 따라 걸을 예정이다.

 

 

 

참고 ; "수타니 파타"

(팔리어(語)로 기록된 남방 상좌부(上座部)의 경장(經藏)에 수록되어 있는 경전)

하나의 시집인데 산문도 더러 포함되어 있다. 《경집(經集)》이라고 한역하는데, 사품(蛇品:뱀의 章) ·소품(小品:작은 장) ·대품(大品:큰 장) ·의품(義品:여덟 편의 시의 장) ·피안도품(彼岸道品)의 5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시불교의 경전 중 가장 오랜 작품으로, 특히 의품과 피안도품 등 3장은 최초에 독립되어 유포되었던 불교 최고(最古)의 경전이다.


① 사품에는 12경이 있는데, 그 제1경에 “비구는 뱀이 허물을 벗듯이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는 구절이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에 사경(蛇經)이라고도 불린다. 제3경에는 수행자를 위해 모든 집착을 버리고 “외뿔소처럼 홀로 유행(遊行)하라”는 유명한 시가 반복되고 있다.

② 소품은 비교적 짧은 경 14개로 되어 있고, ③ 대품은 상당히 긴 경 12개로 되어 있다. 그 중 대품의 제1경인 출가경(出家經), 제2경인 정근경(精勤經), 제11경인 나라카경(經) 등 3경은 석가의 전기에 관한 가장 오랜 자료이다. 제9 바세타경(經)에서는 출신성분에 의해서 브라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는 행위에 따라서 브라만도 될 수 있고, 수드라(천민)도 될 수 있다고 하여 4성(四姓) 평등의 이치를 설명했다. 또한 12경의 이종수관경(二種隨觀經:두가지의 관찰)은 소박한 형식으로 연기(緣起)의 이치를 설하고 있다.

④ 의품은 8게품(八偈品)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여덟 편의 시로 이루어진 경이 많기 때문이다. 한역 《의품경(義品經)》이 이에 해당한다.

⑤ 피안도품은 앞의 경전들과는 달리 전체가 통일성을 지니고 있는데, 16명의 학생이 차례로 석가에게 물으면 이에 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수타니파타》가 현재의 형태로 결집된 것은 BC 3세기 이후의 일이다. 또한 이《경집》에는 《니데사:Niddesa(義釋)》라고 하는 오래된 주석서가 있다. 이것은 의품 ·피안도품의 2장과 사품 제3경에 대한 어구주석이다. 이 주석서의 성립 당시(BC 3세기의 아쇼카 왕대) 아직 《경집》 전체가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새로운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내용은 최고대의 불교를 밝힐 수 있는 훌륭한 자료이다. 순수하고 소박한 불교사상을 설명하며, 초기 교단의 형세를 반영하고 있다.(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