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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장거리 여행

전남 강진군 남도문화답사(전편) - 김영랑생가, 다산초당 등

by 삼도갈매기 2013. 3. 25.

 

 

 

2013년 3월 24(일요일)

인도행회원 40여명과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에 자리한 "다산초당"과 "백련사" 그리고 "김영랑 생가" 등을 답사하였다.

오전 07;00 부산을 출발하여 3시간 30여분을 달려 강진군 도암면 다산초당 입구에 있는 "사의재(四宜齋)"에 먼저 도착하여

전라남도 강진군 남도문화답사를 시작하였다.

 

 

 

 

 

 

 

 

- 사의재(四宜齋)에서.....

 

사의재(四宜齋)에 도착하니 커다란 느티나무가 정약용 선생이 이곳에 거처했음을 알리는듯 일행을 반긴다.

이곳은 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1762~1836)이 강진에 유배되어 4년간(1801~1804)

거쳐 하였던 집터다. 그후 도암면 귤동마을로 옮겨 초당(草堂)에서 우거(寓居)하면서 목민심서(牧民心書) 등 많은 책을 저술하여

다산학(茶山學)을 정립한 곳이다.(근처 표지석에서 옮김)

 

 

사진에서 처럼 초가집 두채가 나란히 서있다.

전면(왼편) 초가집은 주막집이고, 그 뒤에 초가집(오른편)이 다산이 머물렀다는 사의재이다..

 

 

 

사의재(四宜齋)란 현판이 걸린 마루에 걸터앉았다.

사의재(四宜薺)는 다산 정약용이 1801년 강진에 유배 와서 처음 묵은 곳이다.

사의재는 이곳 주막집(동문매반가) 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골방 하나를 거처로 삼은 다산이 몸과 마음을 새롭게 다잡아 교육과 학문연구에 헌신키로 다짐하면서 붙임 이름으로 아래에서 보듯 “네가지를 올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다산은 생각과 용모, 언어, 행동, 이 네가지를 바로하도록 자신을 경계하였던 것이다. “생각을 맑게 하되 더욱 맑게, 용모를 단정히 하되 더욱 단정히, 말(언어)을 적게 하되 더욱 적게, 행동을 무겁게 하되 더욱 무겁게” 할 것을 스스로 주문하였다고 전해진다.

 

 

 

 

다산은 이곳에서 4년동안 기거하였다.

임금의 총애를 받던 위치에서 하루아침에 낯선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의 심정은 참담했을것이다...(위 사의재 샘물)

 

 

 

정약용은 이곳에 머물며 대표적인 저서인 경세유표를 저술했고

관아 벼슬아치 자제를 가르치기도해 다산의 첫번째 유적지인 다산초당에 못지않은 의미있는 곳이기도 하다...

주요 시설은 본채인 주막과 사랑채, 초가 정자와 우물, 장독대, 정원 등으로 조선시대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다.

(위 사진 ; 사의재 연못)

 

 

 

 

이번 여행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찍은 단체사진 - 카페에서 옮김

 

 

 

 

사의재 관람을 마치고 300여 미터에 있는 시인 "영랑 김윤식 생가"를 찾아가는 중이다.

남도 문화답사 1번지인 전남 강진군....위 사진에서 처럼 "정약용 남도 유배길" 그 옛날을 회상하면서 함께 따라가 본다.

 

 

 

유배길 곳곳에.....시인 김영랑 시비(詩碑)l가 세워져 있다.

"문허진 성터"(무너진 성터)....옛날 한글 그대로 시를 써서 관람객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전라남도 강진군에 아름드리 동백나무가 이렇게 많은줄 몰랐다.

도심속에 피는 동백꽃과는 확연히 다른 붉은색으로 남쪽지방 여느곳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다.

 

 

 

 

- 금서당(琴書堂)에서....

 

김영랑 시인이 이곳 금서당에서 어린시절 공부를 하였던 서당이다. 

 

 

"금서당 옛터"라고 이정표가 세워진 반쪽짜리 기와집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뒷산의 소나무와 마당의 잔디, 그리고 종려나무와 감나무가 한데 어울려  멋진 조화를 이루어

신기하고 상큼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는 집으로 마당한켠에 놓인 의자에 앉아 전면에 바라다 보이는 강진만의

아름다운 전경이 한폭의 그림처럼 보인다....

 

 

위 표지판을 요약하면.....

금서당에서 일찍부터 서당 역할을 하였는데 영랑 김윤식도 이곳에서 5년을 수학했으며.

이곳은 1950년 김영렬 화백이 매입하였고, 반쪽은 오래 된 기와집, 반쪽은 슬레이트 지붕을 한 벽돌집을 짓고

작품활동을 하기 전까지는 그냥 폐허로 있었으며 지금은 김화백의 미밍인이 찻집을 운영하면서 관리하고 있다.

건물 입구에는 완향찻집이란 간판이 걸려 있는데 사실은 김화백의 갤러리로 보는게 옳은듯 하다...

 

 

 

 

 

- 시인 영랑 김윤식 생가(生家)에서

 

금서당 옛터에서 150여 미터 아래에 "시인 영랑 김윤식 생가" 가 있었으며.....

위치는 강진군 강진읍 남성리에 있다. 

 

 

 

이곳은 현대문학사에 있어서 큰 자취를 남긴 김윤식(永郞 金允植, 1903-1950)이 태어난 곳으로 4,000여㎡의 넓은 면적에

정면 5칸, 측면 1칸인 안채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랑채, 문간채 등 3동의 건물이 있는데 모두 초가지붕으로 만들어져 있다.

'영랑 김윤식의 생가'라는 역사 문화적 가치와 함께 20세기 초반 건조물인 전통한옥과 근대 건조물의 이행기의 가옥으로서

문화변용의 형태도 볼 수 있는 귀중한 건축자료이며 근처엔 정약용의 남도 유배의길이 잘 정비되어 있기도 하다.

 

 

 

문간체 입구에 영랑 김윤식 시인의 대표작 "모란이 피기까지" 앞에서...

생가 근처에 많은 시(詩)가 새겨진 시비(詩碑)가 있었으니....제목 몇가지만 소개한다

동백닙에 빛나는 마음, 내마음 고요히 고흔봄길우에,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등등이 새겨져 있었다.

 

 

입구에 세워진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 252호인 "영랑 김윤식 생가" 임을 알리는 표지석

 

 

정면 5칸과 측면 1칸인 안채 모습이다...사람은 살지않지만 깨끗이 정리되어 있다.

5 ~ 6월에 이곳을 찾아갔더라면 곱게 핀 모란꽃에 흠뻑 취했을텐데.....근처에 모란 새싹이 군데군데 보인다.

 

 

안채 내부 모습....부엌에는 항아리 솥뚜껑 등 당시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었다.

 

선생은 1903년 1월 16일 전라남도 강진에서 김종호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 학원

중학부에 입학하여 용아 박용철 선생과 친교를 맺었다고 한다. 1921년 일시 귀국하고 이듬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

학원 영문과에 입학하였으며 간토 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여 시문학 창작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이후 선생은 1930년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등과 함께 시 문학지를 창간하여 30여편의 주옥같은 작품을 발표하였고,

1934년 4월에는 문학지 3월호에 "모란이 피기까지는" 을 발표하였으며, 1935년에 "영랑시집"을 발간하였으며, 1950년 한국전쟁때

부상하여 9월 29일 서울자택에서 47세의 젊은 나이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였다..

 

 

영랑 김윤식 시인의 생가 뒤뜰에 몇 백년은 되었음직한 아름드리 동백나무와 동백꽃이 활짝 피어 있었으며

주변 대나무 숲은 긴 여행으로 지친 몸과 마음이 쉬기엔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맑고 푸르렀으니....

풍성한 볼거리가 있는것은 아니지만 시인의 숨결을 느끼기에 그나마 충분했던걸로 기억된다.

 

 

 

 

 

 

 

- 다산 유물전시관에서....

 

 

다산 유물전시관은 1999년 8월 7일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개관되었으며, 다산초당 남쪽 8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애와 업적 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으며 내부엔 다산의 영정, 다산연보,

가계도, 학통, 다산의 일생, 다산의 업적과 유물 등이 판넬과 조형물로  입체감 있게 전시되어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면 지난해 여름 다산의 탄생 250주년 특별전이 열렸던 포스터가 벽면 한곳을 채우고 있다..

다산 정약용은 1762년(조선 후기) 한강변 마현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집안은 8대 연속 홍문관 학사를 배출한 적이 있는 집안이었고,

외가는 학문과 예술의 집안이었다. 형제들은 학문적 재주가 있어 실학과 서학(천주교)에 일찍 눈을 떴으나 꽉 막힌 시대와 당쟁에

희생되고 말았다.

 

 

전시관에 들어오면

수원성의 축조시 거중기, 고륜(鼓輪), 활차(滑車) 등의 건설기계를 창안한 모형이 세워져 있다..

    

 

 

 

다산 정약용은 1762년(임오년, 영조38년) 음력 6월 16일,

아버지 정재원(荷石 丁載遠)과 어머니 해남 윤씨(海南 尹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초부면(草阜面) 마재(馬峴)로 오늘날의 행정구역으로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이다.

다산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썼다. 22세에 성균관에 들어가 정조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

실학의 대가 성호 이익의 글을 접하고서 학문의 뜻을 굳게 했으며 그때 처음으로 천주교를 접하기도 했다.

 

다산은 28세에 대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이 시작됐다. 학문과 행정에서 정조의 신임을 얻으며 측근으로 활동했다.

규장각 초계문신으로서의 활동, 수원화성의 설계, 암행어사로서의 활약, 곡산부사 임기 중 지방행정관으로서의 치적 등으로

장차 정조가 중용할 것이 예상됐다. 그러나 정적들은 다산의 성장과 그에 대한 정조의 총애에 위기감을 느끼며 천주교를 빌미로

그를 제거하고자 했다.

 

다산은 정조가 죽자 정적들에 의해 사지에 내몰린다. 겨우 목숨을 건져 18년간의 긴 유배생활에 들어갔다.

다산은 자신의 운명에 결코 좌절하지 않고 시대의 아픔을 학문적 업적으로 승화시켰으며. 경학과 경세학 등 여러 방면의

학문연구에 힘써서 600권이 넘는 책을 저술했다. 그의 저술은 당시 조선사회의 시대적 모순을 극복하여 나라를 새롭게 하고

민(民)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57세때 18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18년을 더 살았다. 자신의 저술을 수정하고 보완했으며.

자찬묘지명을 지어 자신의 삶을 정리하기도 했으며. 자신의 사상과 학문을 훗날 인정해주길 기대하기도 했다고 한다..

 

 

 

목민심서(牧民心書)는 "고금의 이론을 찾아내고 간위(奸僞)를 열어젖혀 목민관에게 주어 백성 한사람이라도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의 마음씀이다"라고 하여 현 국가체제를 인정한 위에서 목민관을 중심으로한

향촌통치의 운영개선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편 흠흠신서(欽欽新書)는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옥사에 대해  "백성의 억울함이

없기를 바라는 뜻"에서 통치자의 인정(仁政), 덕치(德治)의 규범을 명확히 하고자 저술되었다.

 

 

그외 국방, 과학 그리고 배다리와 여전제 등을 기록하여 남겼으며

특히 물리학적인 현상의 본질을 규명하는데에도 관심을 기울여 볼록렌즈가 태양광선을 초점에 집중시켜 물건을 태우는 원리,

프리즘의 원리를 이용한 사진기 효과 등을 밝혀냈다. 또한 종두법(種痘法)의 실시와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종두심법요지

(種痘深法要旨)를 저술했고, 각종 약초의 명칭·효능·산지·형태 등을 조사 검토하여 생물학적인 연구 성과를 내기도 했다.

이러한 기초과학에 대한 관심은 구체적인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기술개발로 연결되어 농기계, 관개수리시설 및 도량형기를

발명하고 정비했으니........

 

 

 

 

 

 

- 다산초당(茶山草堂)에서.....

 

 

다산 유물전시관 관람을 마치고 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을 찾아가는 길이다.

다산초당은 정약용 선생께서 18년간의 강진 유배생활중 10여년을 지냈던 곳으로, 목민심서 등

여러책들을 썼던 곳으로 유명하고 또한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가는 길은 유배자의 길이라고도 한다.

 

 

유물전시관에서 다산초당을 찾아가는 길에 만난 두충나무 숲길

녹음이 짙은 한여름엔 이곳 두퉁나무의 푸르름이 한결 운치가 있다는데...... 

 

 

오솔길 한가운데 울퉁불퉁 나무 뿌리가 보이기 시작하니

이곳을 "뿌리의 길"이라고 부르는데 이곳과 관련된 사연들이 많으니

아래 사진처럼 시인 정호승님이 시를 써서 소개한 곳으로도 유명새를 타는곳이다....

 

 

 

 

 

도암면 귤동리 산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사적 제 107호)에 도착하였다.

 

다산초당에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의 초당으로, 양 옆에 역시 기와집 동암과 서암, 그리고 좀 떨어진 곳에

천일각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폐허가 된 자리에 복원한 건물들이다. 1957년 다산유적보존회에서 ‘초당’을 복원했고,

1974년에는 동암과 서암을 복원하며 천일각을 지었다. 현재 남아있는 정약용의 손길은 초당 옆의 연못과, 마당의 넓적한 바위,

집 뒤의 샘과 그 뒤편 바위에 새겨진 “丁石”이란 두 글자 정도로 연못은 그가 마시던 샘이고 바위는 그가 차를 끓이던 곳이다.

 

 

이곳을 찾아오는 길이 약간 가파르고 힘에 겨웠던지 일행이 마루에 앉아서 쉬고 있다.

원래는 초가집이였는데....관리상 어려움 때문에 복원하면서 관리가 쉬운 기와집으로 변경했다고 한다.

 

 

 

위 "다산초당(茶山草堂)"이란 현판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를 집자(集子)한것이라고 한다...

 

 

 

다산초당에서 아내와 함께.......달마루님이 찍어준 사진

 

 

초당 한켠에 조성된 연못

연못 한 가운데 바닷가에서 주어온 돌을 쌓아 봉우리를 지어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이라 불렀다..

연못에는 팔뚝만한 잉어들이 뛰놀았으며. 그는 초당 옆 구석방에 관어재(觀漁齋)라 현판을 걸고 대롱을 타고

내려오는 자연수가 연못에 떨어지는 물소리에 스스로 취했으며. 다산은 잉어의 움직임을 보고 날씨를 알아내기도 했다.

 

 

초당 뒤편 병풍바위에 새겨진 "정석(丁石)"

다산이 직접 새겼다고 전해지며, 다산초당의 제 1경이라고 한다

아무런 수식도 없이 자신의 성 "정(丁)"자만 따서 새겨 넣은 것으로 그의 군더더기 없는 성품을 보여준는듯 하다.

 

 

 

초당 한켠에 자리한 "약천(藥泉)"

다산 선생이 직접 수맥을 찾아서 샘을 만들고, 차를 끓일때 사용했다는 샘(泉)으로 지금은 식수로 사용할수 없다..

 

 

 

다산초당 마당 한가운데에 자리한 "다조"

차를 끓였던 반석으로 차 기구를 벌여놓은 탁자로 쓰인듯

 

참고 ; 다산초당에는 다산선생의 채취가 남아있는 "다산 4경(景)"이 있으니...

연못에 조성된 "연지석가산" 그리고 "정석바위", "약천", "다조" 등을 "다산 4경"이라고 불린다.

 

 

다산초당 왼편 20여 미터에 자리한 "동암(東庵)"으로 선생이 거쳐하던 곳이다...

그는 다산초당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 담론했다면...2천여권의 책을 갖춰 놓고 집필에 몰두한 곳은 동암(東庵)이다.

송풍암이라고도 하며 일명 송풍루(松風樓)라 부른다. 동암의 현판은 보정산방(寶丁山房)이라 했는데 추사(秋史)의 친필을

모각(模刻)했으며..... 옆에 다산동암(茶山東庵)이라는 현판은 다산이 쓴 글씨를 여러군데서 집자(集字)한 것이라고 전한다...

 

 

 

흑산도로 귀양간 둘째형님과 고향이 그리울때 심회를 달래던 팔각정 "천일각(天一閣)"에 도착하였다.

천일각이란 이름은 "하늘 끝 한 모퉁이"라는 뜻의 천애일각(天涯一閣)을 줄인말로 다산의 유배시절엔 없던 건물인데

돌아가신 정조대왕과 유배중인 정약전이 그리울때 이 언덕에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마음을 달랬을것으로 생각하여......

 

 

팔각정에 올라서 멀리 강진만을 바라다 본다

강진만을 조망할 수 있는 이 언덕에서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맞으며 흑산도에 유배되어 있는 형 정약전을

마음속으로 그리며, 만날 수 없는 귀양살이의 설움을 흠뻑 쏟았을 이곳에 서니 그의 고달픈 유배생활이 가슴에 맺힌다.

 

 

백련사로 가는 오솔길로.....유배생활동안 벗이자 스승이요 제자였던 혜장선사와

다산을 이어주는 통로였으며, 800미터 길에는 야생차 군락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숲을 만날수 있는곳이다.

 

 

 

 

나무가지 사이로 백련사가 보이는곳에 "해월루"(海月樓)가 있다.

이층 누각에 오르니 환하게 펼쳐진 강진만이 시원스럽게 한눈에 들어온다.....

 

 

해월루에서 바라다본 강진만 풍경(사진 위 아래) 

이곳 해월루는 이고장에서 일출을 볼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아래사진에서 처럼 해월루 팔각정에서 둘러앉아 점심을 해결하였다.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땀을 흘렸더니 그늘에 앉아 점심을 먹는데 한기가 드는듯 춥다...

 

 

 

정약용.....그는 오로지 붓으로만 600여 권의 책을 저술을 했다는 것은 생각해 보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의 형제 세 사람은 모두 천재로 알려져 있는데 큰형 정약종은 천주교 교리를 책으로 펴냈다가 사형되었고,

둘째형 정약전은 정약용과 함께 귀양을 갔으며. 그는 흑산도에서 19년간 귀양을 살며 물고기를 관찰하여 ‘자산어보’를 펴냈다.

다산은 오랜 세월 귀양을 살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잃지 않고 욕심을 버린채 나라를 걱정하는 저술에만 심혈을 쏟은 것이

오히려 건강에 도움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저술의 집중력이 정신을 맑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1804년 다산이 시로 쓴 사회비평 "독소(獨笑)"는 210여년 전에 쓴 것이지만 오늘 날에도 교훈으로 가슴에 와 닿는다.

사람의 행태를 비평한 글이지만 그 뜻은 무한히 깊은것이니...가슴속에 새기는 기분으로 이곳에 기록해 본다.

 

유율무인식(有栗無人食) 양식이 많은 집은 자식이 귀하고
다남필환기(多男必患飢) 아들이 많은 집엔 굶주림이 있으며
달관필준우(達官必蠢愚) 높은 벼슬아치는 바보스럽고
재자무소시(才者無所施) 재주있는 인재는 재주 펼 길이 없네
가보소완복(家寶少完福) 완전한 복을 갖춘 집 드물고
지도상능지(至道常陵遲) 지극한 도는 늘상 쇠퇴하기 마련이며
옹색자매탕(翁嗇子每蕩) 아비가 절약하면 아들은 방탕하고
부혜랑필치(婦慧郞必癡) 아내가 지혜로우면 남편은 바보이네
월만빈치운(月滿頻値雲) 보름달 뜨면 구름 자주 끼고
화개풍오지(花開風誤之) 꽃이 활짝 피면 바람이 불어대지
물물진여차(物物盡如此) 세상일이란 모두 이런것이니
독소무인지(獨笑無人知) 나 홀로 웃는 까닭 아는이 없을것이다...

 

다음 후편은 해월루 근처에 있는 사찰로 신라 문성왕때 창건한 백련사(白蓮寺)와 그곳에 핀 붉은 동백꽃

그리고 근처 보성군에 자리한 대원사 사찰 이야기로 꾸며집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