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 이야기/부산,경남여행

경남 김해시 금관가야 옛유적지 및 수로왕릉 등 관람.

by 삼도갈매기 2013. 3. 20.

 

 

 

 

 

 

2013년 3월 18일(월요일) 오후 2시

인도행회원 51명과 경남 김해시에 소재한 봉황동 유적지와 금관가야의 옛터 유적

그리고 김수로왕릉 및 수로왕비릉, 와룡매(臥龍梅)가 활짝핀 김해건설공고와 연지공원 등을 관람하였다.

 

 

 

부산 ~ 김해 경전철을 이용 "수로왕릉역"에서 하차 회원들과 미팅한후

오늘 탐방할 금관가야의 유적지에 대한 설명과 간단한 주의사항을 듣고 도보에 나섰다...

 

 

 

출발전 단체사진(카페에서 옮김)

어제밤에 50mm의 봄비가 내리더니....약간 흐린날씨를 보인다.

 

 

 

- 김해봉황동 유적지

 

가야시대 대표적 조개무지인 회현리 패총과 금관가야 최대의 유적지인 봉황대가 합쳐서

사적 제2호로 지정된 유적지로 가야시대 포구와 생활체험이 복원되어 있다.

 

 

 

출발지 근처 작은 호수에 "가야의 배(船)"가 있다.

가야는 고대 동아시아의 여러지역과 교역을 통해 성장했으며 수로와 해로를 통하여 왜(倭)와 한사군에도 철기를 수출하였다.

가야의 배는 현재까지 실물로 발굴된 사례는 없으나 가야시대의 배를 본떠 만든 배모양 토기가 여러점 남아 있어 구조와 형태,

크기 등을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단다. 먼 옛날 이곳이 바다였을것으로 짐작되어 이곳에 배를 복원하여 띄웠다고 한다. 

 

 

봉황동 유적지 입구에 세워진 "망루" 앞을 지난다.

망루는 지상으로부터 10m쯤 높게 만들어 외부침입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는 시설의 일종이다.

망루와 관련된 유구는 청동기시대의 취락유적에서 많이 확인 되었고 가야시대에도 널리 사용되었다 한다.

 

 

 

봉황동 근처에 피어있던 매화와 산수유 그리고 붉은 동백.

지난달 카메라를 바꾸고서 꽃을 찍는 접사기능을 확인하지 않았기에...시험삼아 찍어본다

똑딱이 카메라로 뒷배경을 흐리게 하면서 멋지게 꽃사진을 찍는다는게 어렵다는것을 다시한번 실감한다.

 

 

 

봉황동 유적지 언덕에 오르니 "가락국천제단"이라는 비석이 나타난다.

천제단은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일행중 김해에 살고계신 "초록달님"이 열심히 해설을 해주신다.

 

 

 

봉황동 유적지에서 바라다 본 "김해시내" 전경(위 아래사진)

 

 

 

천제단 위로 작은 언덕이 있기에 그곳에 올랐더니 "황세바위"라고 쓰여있다,

황세는 가락국의 9대 임금 겸지왕때의 인물로 황정승의 아들이다. 황정승과 친구사이인 출정승은 각기 아들을 낳으면 의형제를 ,

아들과 딸을 낳으면 결혼시키기를 약속했으나, 황정승의 집이 몰락하자 출정승은 딸(출여의)을 아들이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의형제를 맺은 황세와 출여의는 어릴때부터 같이 살았는데 어느날 황새가 출여의에게 오줌 멀리누기 시합을 하였는데 출여의는

삼대줄기를 이용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한다. 이 시합을 한곳이 바로 황세바위이다. 출여의가 자라면서 점점 여인의 모습을 띠게

되자 결국 결혼을 약속하였다. 그후 신라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황세가 왕의 명을 받아 유민공주와 결혼하게 되자 출여의낭자는

황세를 그리워하다 죽게 되었고 황세 또한 여의낭자를 그리워하다 죽었다. 유민공주는 유민산 (임호산)에 출가하여 여승이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 남아 있는 곳이다.(근처 표지판에서....) 

 

 

황세바위 근처에 아담한 "여의각".

여의각은 출여의 낭자의 정절을 추모하는 사당이다. 출여의 낭자는 출정승의 딸로서 아버지와 친구사이인 황정승의 아들 황세와

어릴때 혼약한 사이인데 황세가 신라군을 물리친 공로로 유민공주와 결혼하게 되고 여의낭자는 다른사람과 결혼하라는 아버님의

권유를 물리치고 황세장군을 그리워하며 혼자 살다가 24세의 꽃다운 나이에 죽었다. 황세장군 또한 여의낭자를 그리워하다 병을

얻어 그해에 여의낭자를 따라 죽었으며 유민공주는 유민산(임호산)으로 출가 여승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여의각은 회현동민의 힘으로 사당을 건립 매년 단오날 추모재를 지내고 있다.(입구에 세워진 표지판에서....) 

 

 

고상가옥

이곳에 복원된 고상가옥과 주거등은 봉황동유적정비사업으로 복원한 것이다.

가야시대의 일반적인 주거형태는 반지하식으로 땅을 파고 그위에 벽과 지붕을 올리는 형태인데, 보편적인 수혈죽와 달리

바닥면이지면보다 높게 만들어진 건축물로 주로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나 제의 등과 관련한 특수용도의 건물이 많다.

고상가옥은 난방시설이 용이하지 않아 일반 주거용으로는 부적합 하지만 짐승과 습기, 침수등 으로 부터 침해 침수당하지 않아

주로 창고용으로 이용하였다 한다.(근처 설명서에서....)

 

 

 

봉황동유적패총전시관

봉황동유적은 봉황대라 불리는 구릉과 그 주변 지역, 회현리 패총등을 망라한 대규모의 생활, 생산 유적으로써 특히 회현리 패총은

1907년 우리나라 최초의 고고학적 발굴조사로 유명하다. 이 일대는 청동기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었고 성곽, 대규모 주거지, 고상

건물지, 방어시설, 공방, 대규모의 패총 등이 확인됨으로써 금관가야의 중심 거점지역임이 밝혀졌다.(입구 안내문에서....)

 

 

 

 

 

 

 

 

 

- 김수로왕릉 관람

 

봉황동유적패총전시관에서 10여분 걸었더니 사적 73호인 김수로왕릉에 도착하였다.

김수로왕릉은 김해의 상징적 문화유적으로 가락국의 시조 왕릉이다. 수로왕은 서기 42년 3월 3일(음력) 구지봉에서 내려와서

3월15일에 즉위함으로서 가락국을 건국하였고, 199년 3월 20일에 세상을 떠나 이곳에 묻혔다는데...자그마치 158살을 살았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김수로 왕은 인도땅에서 온 아유타 나라의 공주 허황옥과 혼인하여 가락국을 세웠다 한다.

 

 

김수로왕릉 입구에 도착하였다.

길잡이 백일봉님의 수로왕릉에 얽힌 사연과 이곳을 관람하는 간단한 주의사항을 들려주신다..

 

 

 

두번째 문(駕洛樓)을 통과하면 거대한 김수로왕릉이 보인다.

 

 

수로왕릉 소개는 아래 사진으로 대체함..

 

 

수로왕릉 안에 세워진 각종 비문과 전각들

 

연화대석(蓮花臺石) ; 가락국 중엽에 조각된 것으로 호계사 옛 절터에 있던 것을 1910년 이곳으로 옮겼다.

                                돌 윗부분의 형체와 내용은 알수 없으나 일제때 없어졌다고 전한다.

숭신각(崇神閣) ; 가락사와 숭선전사가 기록된 비(碑)...

                        1885년(고종 22년)에 3칸으로 창건되어 1988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되면서 보수되었다.

 

 

김수로왕릉 서쪽정원

 

 

 "천강육란석조상" (김해김씨의 시조인 황금알 6 조형물)

건국설화에는 "서기 42년 하늘에서 6개의 황금알이 담긴 금상자가 구지봉에서 내려왔는데

그 알에서 맨 먼저 깨어난 사람이 김해김씨의 시조가 된 김수로이다"라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전해진다... 

 

 

 

수로왕릉 뒤편에 조성된 연못

 

 

 

 

 

 

 

- 김해한옥체험관 관람

 

가야문화 발상지인 김해는 시가지 곳곳에 문화유적이 산재하며 역사와 문화가 함께하는 관광도시이다.

 

 

김수로왕릉과 작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우리 고유의 전통한옥을 체험할수 있는 김해한옥체험관을 개관하여 고즈녁한 옛 정취를 느낄수 있는곳이다. 

(이곳은 누구든 이용할수 있으며 저렴한 가격에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는듯....)

 

 

 

 

 

- 김해대성동고분군

 

 

고분군 입구에 세워진 "허황옥상(許黃玉像)"

허황옥(許黃玉, 서기 33 ~ 189) 인도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

대가락국 김수로왕의 비(妃)....김해김씨(金海金氏), 허씨(許氏), 인천이씨(仁川李氏)의 시조모(始祖母)

 

 

대성동 고분군 언덕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일행을 반긴다.

주변 지형에 비해서 약간 높은 언덕으로 1990년경에 대성동 고분군이 발견되었으니

가락국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단다. 그 당시(3세기경) 가야는 전성기를 이루었다고 한다.

 

구릉주변에는 1~3세기때의 목관묘가 있고 구릉지대에는 4세기대의 목곽묘가 밀집되어 있어 사적 제 341호로 지정되어있다.

 

 

근처에 있는 대성동고분박물관은 휴관(월요일은 휴관임)으로 입장하지 못함

 

 

 

 

- 건설공업고등학교(매화거리)에서...

 

 

 

봄이 되면 전국의 진사님들에게 유명새를 떨치고 있는 김해건설공고 매화를 구경하였다.

입구에 "매화거리"라는 팻말이 있으며....200m 길 좌우로 아름드리 매화 향과 함께 흐트러진게 매화.

고목이다 보니 줄기가 휘어져 옆으로 누워있기도 하였는데....어떤이는 이를 와룡매(臥龍梅)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문 사진사가 전문 카메라로 담아야 될듯....

돌팔이 사진사가 시답잖은 똑딱이 카메라로 매화를 담으니 제대로 담을수가 없다.

 

 

 

 

오래 된 나무에서 피어나는 매화이기에, 향기는 그 어떤 매화보다도 짙고 화려하다.

근처에만 가도 콧속을 파고드는 매화 향기에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니 매화가 만개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동박새 때문에 사진촬영가들의 봄철 최고의 출사지로 손꼽히기도 하는곳이다.

 

 

 

 

 

 

 

- 김수로왕비릉 관람

 

서기 48년 인도 아유타국 공주로 가락국 시조인 수로왕의 왕비가 된 허왕옥의 능이다.

조선 고종 15년에 보수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전한다.....사적 제74호로 지정되었다.

 

 

일행중 김해김씨 성(姓)을 가진분들은

김수로왕릉과 왕비릉 앞에서 본인의 조상님들에게 예를 다하는듯 깍듯이 절을 하기도 한다.

 

 

"김수로왕비릉" 에 도착하였다.

그녀는 아들을 아홉 낳았는데, 한 아들은 어머니의 성을 따라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또한 한 아들은 아버지의 뒤를 이었고

나머지 일곱아들은 지리산으로 입산하여 불도를 닦아 부쳐가 되었다고 전한다. 오늘날에도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는 혼인하기를

꺼리거니와 지리산 자락에 있는 칠불암은 김수로왕이 일곱 아들이 부쳐가 되었음을 기려 지은절로 전해온다. 

 

김수로 왕비릉 옆에는 왕비가 가져온 돌탑이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인도 아유타국(阿踰拖國)의 공주가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가다가 수신(水神)의 노여움으로 가지못하고 돌아오자 부왕이 이탑을 배에 싣고가도록 하여 바다를 무사히 건넜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석탑은 6층으로 석재가 쌓여 있는데 이탑은 원래 호계사에 있었던 것을 현재의 자리에 옮겨놓은것이라고 한다. 

 

 

 

수로왕비릉 입구 오른쪽에 세워진 위 사진의 파사각(婆娑閣)과

파사각 내부에 세워진 파사석탑의 5층모습(사진 아래) 

 

 

파사석탑(婆娑石塔)은 수로왕의 부인 허왕후가 인도에서 건너올때 파도를 잠재우기 위하여 싣고 왔다고 삼국유사에 전하고 있다.

이 탑은 원래 김해의 호계사에 있던 것을 호계사가 폐사되자 1873년 당시 김해부사 정현석이 이 자리로 옮겨 놓았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2호인 파사석탑은 현재 5층으로 되어 있으며. 이 탑을 가지고 올 때 석탑이 깨어져서 많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파도를 진정시켜 준다는 신령스러운 파사석탑은 일명 진풍탑이라고도 하며. 1993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보호각인

파사각을 세웠다고 한다.

 

 

 

 

 

 

 

 

- 구지봉(龜旨峰)에서...

 

 

김수로왕비릉을 답사한후 산책로를 따라 구지봉으로 올라간다.

원래는 거북머리 모양을 닮았다 하여 구수봉(龜首峰)이라 하였는데 수로왕비릉이 있는 평탄한 위치가

거북의 몸체이고 서쪽으로 내민 봉우리 형상이 거북의 머리모양 같다고 하여 이같이 이름을 붙였다고 전한다.

 

 

구지봉(龜旨峰)이라 이름붙여진 돌탑앞에 도착하였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만일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가락국의 아홉촌장이 하늘이 시키는 대로 구지봉에 올라 금관 가야의 임금이 될 김수로를 맞이하려고 불렀다는 노래로

영신군가(迎神君歌), 구지봉영신가(龜旨峰迎神歌) 또는 구지가(龜旨歌)라고 한다. 300여명의 군중이 춤추며 노래하자 하늘에서

6개의 황금알이 내려와 6명의 귀공자로 변해 각각 6가야의 왕이 되었는데 그중 가장 큰알에서 나온 사람이 김수로 왕이였다 한다.

이 노래는 임금을 맞이하기 위한 노래이면서 동시에 무가적(巫歌的)인 주술성(呪術性)을 지니고 있는 서사시의 하나이다.

 

 

 

구지봉석(龜旨峰石)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무덤이란다...

이곳 고인돌은 전형적인 남방식(南方式)고인돌로 규모는 작은 편이지만 특이하게 구릉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정확한 축조시기는 알수 없지만 기원전 4~5세기경 이지역을 다스렸던 추장의 무덤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고인돌 상석에는 "구지봉석(龜旨峰石)"이란 글이 새겨져 있으며 글씨는 조선시대의 명필인 한석봉이 썼다고 전해진다.

 

 

 

 

 

 

 

- 연지공원에서....

 

마지막 관람지인 연지공원에 도착하였다.

도심속 한가운데에 자연미와 조형미로 조화된 인공호반으로 많은분들에게 휴식공간을 제공하여

근처 주민뿐만 아니라 김해시를 찾는 국내외 관광객에게도 즐거움을 제공하는 김해의 명소중 한곳이다.

 

 

 

 

9만4000㎡ 규모로 조성된 이곳엔 연꽃광장, 벚꽃터널, 음악분수, 수변데크,

조각공원, 야생화동산, 미로공원, 야외공연장 등이 조성돼 있고 부들, 연, 수련, 물억새, 어리연 등

각종 수생식물들이 자라는 도심 속의 호수공원이다. 나무데크를 따라 호수를 가로질러 산책하기에 그만이다. 

 

 

 

 

 

호수 가장자리를 따라 만든 호안 산책로는 느린 걸음으로 한 바퀴 도는데 20여 분이 걸린다.

산책로 곳곳으로 이어진 목제 데크 다리가 호수를 가로지르고 있고, 다리 아래로는 원앙새와 오리떼가 물을 가른다.

 

 

 

 


 

 

오후 2시에 시작된 금관가야유적지 관람이 위 사진에서 보듯이 오후 5시 30여분에 끝이 났다.

2,000여년전의 찬란했던 가야문화, 셀수 없이 많은 가야역사문화유적에는 옛가야를 호령하던 용맹스러운 기마무사의 흔적을

느낄수 있었으니 이곳을 찾는 우리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아름다운 역사의 고장 김해금관가야 옛유적지를

일행과 함께 마음으로 느낀 하루였다.

 

아쉽다면 근처박물관(대성동고분박물관, 국립김해박물관, 김해문화의전당, 김해미술관, 김해천문대 등)이 월요일 휴관으로

인해 입장치 못함이였니...다음기회에 볼수 있기를 바라며....멋진곳 안내해주신 인도행 관계자분들께 감사를 드리며.....

김해금관가야옛유적지와 주요명소 등 3시간 30여분간 행복하고 즐거운 도보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