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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장거리 여행

전남 강진군 남도문화답사(후편) - 백련사 및 대원사

by 삼도갈매기 2013. 3. 27.

 

 

 

 

백련사(白蓮寺)는 다산초당과 천연기념물인 동백나무숲이 있어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곳이다.

이곳의 동백나무숲은 천연기념물 제 151호로 지정되어 있고, 대략 1,500여 그루가 자라고 있으며

다산초당과 백련사 구간에는 동백나무숲 사이로 길(道)이 있으니, 일행이 그 길로 백련사를 찾아가는 중이다.

 

참고 ; 백련사와 다산초당 구간 오솔길은 "한국의 명품 숲 10선(選)"에 선정될 정도로 아름다운 길이라고 한다.

 

 

동백나무숲은 길 입구에서부터 시작되는데, 도로변에는 가로수로 동백나무가 심어져 있다.

어두운 숲을 조금 지나가면 앞이 환해지며 차밭이 나타나고 그 위로 동백나무가 자라고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나무는 키가 5 ~7m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길 좌우로 줄지어 자라며

짙은 그늘을 드리워서 마치 깊은 산속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아마도 이 길을 따라 다산 정약용 선생이 백련사를 다녔을것이라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다.

 

 

 

 

 

 

 

 

- 백련사(白蓮寺) 관람

 

동백나무 군락지 근처 백련사(白蓮寺)보이는 입구에 도착하였다.

백련사의 본래 이름은 만덕산 백련사였으며 조선후기에 만덕사로 불리우다가 현재는 백련사라 부르고

신라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고려명종(1170년)때 원묘국사 요세에 의해 중창되었다고 한다..

 

 

고려 후기에 8국사를 배출하였고, 조선후기에는 8대사가 머물렀던 도량이며,

고종 19년(1232년)에 원묘국사 3세가 이곳에서 보현도량을 개설하고 백련결사를 일으킨 유서 깊은 명찰이다

 

 

 

사찰입구에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일행을 반기는데...

녹음이 짙은 한여름에 백련사를 찾아왔더라면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주었을텐데......

 

 

 

입구에 봄의 전령인 붉은색의 홍매와 동백,

그리고 수선화가 곱게 피어 있어 이곳에도 봄이 왔음을 알리고 있다..

 

 

천왕문을 대신하는 만세루(萬世樓) 앞에 몇백년은 되었음직한 백일홍

이곳 백일홍도 한여름엔 백련사 사찰 이름에 걸맞게 아름드리 꽃을 피울텐데....

 

 

백련사 대웅전 (白蓮寺 大雄殿.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6호.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만덕산에 위치하는 백련사는 만덕사라고도 하며, 통일신라 문성왕 1년(839)에 지은 사찰이다.

백련사 대웅전은 신라시대에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안에는 석가모니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앞면 3칸, 옆면 3칸의 규모이며, 오래된 건물이다 보니 사방에 기둥을 세워 받치고 있는 형국이다.

 

 

 

대웅보전 내부 모습

법당에 모셔진 삼존불(아미타불, 석가모니불, 약사여래불)은 1710년에 목조로 조성된 부처님으로 얼굴에 온화한 미소는 당시

불상을 조각했던 조선사람들의 순박하고 지극한 마음을 시대를 넘어 느낄수 있게 하는 힘이 있다. 또한 법당 내부에는 아름다운

벽화와 조각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어 옛 선조들의 아름다운 신앙심을 느낄수 있기도 하다. 

 

 

대웅보전(大雄寶殿) 현판은  원교 이광사(員嶠 李匡師, 1705~1777)의 글씨다.

이광사는 당시 신지도에 귀양 와 있었는데 해남의 대둔사, 이곳 백련사의 승려들과 교류를 가졌다고 전한다..  

(참고 :  해남 대둔사의 ‘大雄寶殿’ 현판과, 구례 천은사 일주문 현판도 이광사의 글씨라고 함.)

 

 

 

대웅보전 좌측에 자리한 "명부전"

명(冥)이란 보고 들수 없는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명부란 저승세계를 뜻하며

명부전은 세상 모든 중생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며 지옥 중생들까지 구제하겠다는 원력을 세운 지장보살님을 모신 전각이다

 

 

대웅보전 우측에 자리한 "응진전"

응진(應眞)이란 "존경이나 곤경 받을만 하다" 라는 뜻이다,

응진당(應眞堂)은 나한전(羅漢殿)이라고도 하며 부처님을 중심으로 16나한상과 영산회상도를 봉안하고 있는곳이다. 

 

 

 

강진 백련사 사적비 (康津 白蓮寺 事蹟碑.보물 제1396호 )

백련사 사적비는 백련사 대웅전에서 오른쪽으로 약 50여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높이 447㎝ 규모의 전형적인 석비(石碑)다. 귀부는 고려 전기의 작풍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고 조각수법도 뛰어나다. 보존상태도 좋은 편이다. 

龜趺(비받침)는 고려시대에, 碑身과 이수(비머리)는 숙종 14년(1688)에 조성했다. 비문은 숙종 7년(1681)에 홍문과 수찬이었던 艮齋 趙宗著(1631~1690)가 지었다. <만덕사지>에 따르면 이곳에는 고려 때 사람 崔滋(1188~1260)가 비문을 지은 원묘국사의 부도비가 있었다고 한다. 그 비신이 조일전쟁 때 파괴되고 돌거북과 비머리만 남아있었는데, 坦機라는 스님이 남은 재료를 이용하여 그 자리에 사적비로 다시 사용한 것이다.(근처 표지석에서 옮김) 

 

 

강진 백련사 동백나무 숲 (康津 白蓮寺 .동백나무 숲천연기념물 제151호.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산55 )

동백나무는 우리나라 그리고 일본, 중국 등의 따뜻한 지방에 분포하며, 우리나라에서는 남쪽 해안이나 섬에서 자란다.

꽃은 이른 봄에 피는데,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춘백(春栢), 추백(秋栢), 동백(冬栢)으로 부른다.

 
백련사의 동백림에는 이밖에 굴참나무, 비자나무, 후박나무, 푸조나무 등도 군데군데 자라고 있으며 

동백꽃이 필 무렵이면 매우 아름다워 전국적인 명소로 알려져 있기도 한다. 

 

 

 

백련사 범종각

 

 

동백나무 숲속으로 들어가면 굵기가 가는 나무들도 있지만 중간 중간에 직경이 20cm 가까운 동백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줄기를 자세히 보면 매끈하지 않고 울퉁불퉁한 굴곡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런 줄기를 보면 동백나무숲이 얼마나 많은

풍상을 겪어 왔는지 짐작할 수 있고 그 나이가 얼마나 많은지를 가늠케 한다.

 

 

백련사 관람을 마치고 동백숲으로난 오솔길을 따라 주차장으로 하산하는 중이다..(위 사진 카페에서 옮김)

 

촘촘히 서있는 나무들 때문인지 숲 바닥에는 다른 나무나 풀들이 많이 자라고 있지 않다.

하지만 푸른 잎들이 숲을 덮고 있어 초록의 향연을 여는 것처럼 보인다. 제철을 만난듯

새빨간 동백꽃은 봄의 향기를 전하는 듯하다. 동백꽃은 가지에 달려 있을 때에는 탐스럽고 예쁜데, 

통째로 떨어진 동백꽃의 모습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할 정도로 가련해 보인다.

 

 

이곳 동백의 유래는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인 다산 초당이 가까이 있고,

이곳에서 다도(茶道)연구를 했던 것으로 미루어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백련사에서 동백이 우거진 숲으로 걸어내려와 주차장에 도착하니 오후 3시쯤 되었다.

천천히 둘러보았지만 그래도 너무 일찍 마쳤으니 근처에 있는 대원사 사찰을 덤으로 구경하기로 하였다. 

 

 

 

 

 

 

- 보성군 대원사(大原寺) 관람

 

강진군에서 다산초당과 백련사 그리고 영랑 시인의 생가 관람을 마치고

근거리에 있는 대원사(전남 보성군 문덕면 죽산리) 및 대원사 티벳박물관에 도착하였다...(오후 4시 20분 도착)

 

 

대원사 사찰 입구에 세워진 "대원사 티벳박물관" 전경

비행기를 타지않고 즐기는 티벳여행이란 포스터가 일행을 반긴다

이곳 박물관 내부에는 티벳, 네팔, 부탄, 몽골, 인도의 문화유산 1,000여점과 만다라 체험,

달라이라마실 그리고 죽음체험실을 경험할수 있는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으며 입장료를 징수하고 있었다.

(사실은 입장료(\3,000원)로 인하여 원할하게 내부를 구경할수 없었다...아래사진은 박물관 입구 모습)

 

 

 

 

박물관 앞에 세워진 "수미광명탑" 전경

티벳박물관은 티벳의 정신문화와 예술세계를 소개하고 한국 불교와 영적인교류를 촉진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며.
인근의 대원사 주차장 위의 터를 닦아 티벳사원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천봉산 대원사 일주문

대원사는 전남 보성군 문덕면 죽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원사를 품고 있는 천봉산(天鳳山)은 해발 609m 로 보성, 화순,

순천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대원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503년(백제 무녕왕 3) 아도(阿度)가 창건하여 죽원사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리적인 여건으로 보아 신라에서 활동하던 아도가

백제에 와서 창건했다는 점에는 의문이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큰 절의 면모를 갖추었다. 1260년(고려 원종 1) 송광사의 제5대

국사인 충경 천영(沖鏡 天英; 慈眞도 호)이 크게 중창하여 중봉산(中鳳山)을 천봉산으로 고치고, 절 이름도 대원사로 바꾸었다.

그 뒤 여러 차례의 중건과 중수를 거쳤으며, 1948년까지는 천불전(千佛殿)을 중심으로 한 수많은 건물과 상원암(上院庵),

호적암(虎蹟庵) 등의 부속 암자가 있었다. 그러나 1948년 여순반란사건 때 대부분 소실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원사 입구에 만들어진 "솟대"

일행중 누군가 솟대를 세운 목적을 묻는데....아무도 정확한 대답을 못했으니...찾아본다..

 

참고 ; "솟대" 를 세우는 목적에 따라 세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개인이 가정에서 임시적으로 경축이나 기도할 때 세우기도 하고,

둘째는 마을 입구나 경계, 성역에 항상 세워 수호신 기능을 하기도 하며. 

셋째는 과거에 급제한 자신의 과시와 가문의 행운을 기원할 목적으로 세우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는 화주(華柱)라고 한다.

 

솟대의 모양은 지역에 따라 다양하지만 일반적인 것은

긴 장대 꼭대기에 세갈래로 된 나뭇가지 위에 세 마리의 새를 조각하여 올려놓은 형태라고 한다.(이상 인터넷에서....)

 

 

 

대원사 부모공덕불(위 사진중 아래쪽 좌측사진) 

"집안에 부처님이 계시니 바로 부모님입니다"...라고 성철 큰스님이 말씀하셨다.(아래 내용 참조)

 

 

 

 

 

 

 

낙태된 어린 영혼을 천도하기 위하여 1993년 6월에 조성된 석조지장보살상이다.

이 보살상이 조성되어 있는 위치는 조선 중기때 있었던 지장전(地藏殿)의 자리였다고 한다.

지장보살은 스님 모습으로 한손에는 육환장(六環杖)을 잡고 한팔에는 어린 아이를 안고 서 있다.

앞에는 동자상의 지장보살상이 108분을 모시고 있어 야외 지장전이라고 할 수 있다.

 

 

 

대원사 극란전 앞에서 몇분이 단체사진을 담는다.(위 사진 카페에서 옮김)

극락전은 천봉산 봉우리를 약간 오른쪽으로 둔 정남향을 하고 있는 사찰로서 6·25동란 이전까지만 해도 10여동의 건물들이 유존되고 있었으나 여순사건때 모두 불타버리고 거의 폐허가된 상태였다. 그러나 다행이도 당시 극락전 건물만 남아있게 되었다. 

 

 

 

 

천불전

 

 

 

김지장전(金地藏殿)

2001년 역사 속에 실재했던 천년 고찰 대원사에 김지장전이 건립되었다. 
이는 지장보살의 위업을 기리는 것 외에 신라 출신 지장보살의 법맥이 현세의 옛 백제땅에 이어졌다는 데에도 의미가 크다.

아래사진 김지장전 내부모습

 

 

 

 

 

 

대원사 사찰 입구에 작은 연못 엎에 만들어진 "애연정"(愛蓮亭)

한여름엔 이곳 연못에 연꽃이 장관을 이루니 또하나의 볼거리를 제공할듯...

 

 

다산 선생의 유배지를 따라 남도답사를 하면서 많은것을 배우고 느낀 하루였다....

이분의 업적이 방대하여 어느 한분야만을 설명하기도 어려우니 그중 잘 알려지지 않는 "다산의 가족사랑"을 간략하게 옮겨본다.

 

 

- 부인 홍씨와의 애뜻한 이별

15세에 한 살 연상인 풍산 홍씨(1761~1838)와 결혼한 다산은 공교롭게도 결혼 60주 년이 되는 회혼일에 먼저 눈을 감고 홍씨는 2년 후인 1838년 남편 다산을 뒤따른다. 10대 중반의 철없던 나이에 결혼하여 힘든 과거공부와 분주한 벼슬살이로 인해 부부 간의 애틋한 정을 제대로 나누지 못한 다산은 정치적 반대파의 모함으로 인해 한창 나이인 40세에 유배를 떠나며 사랑하는 아내와 눈물의 생이별을 하게 된다. 죄인의 신분으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며 기약없는 머나먼 귀양길을 떠나는 남편을 아내는 세살박이 막내아들을 품에 안고 눈물로 전송한다. 한참 말을 배우며 재 롱을 피우던 귀여운 막내가 네 살에 요절하였다는 소식에 자신의 애절한 슬픔은 뒤로 하고 제 뱃속에서 낳은 애를 흙구덩이 속에 집어넣는 에미의 애통한 심정을 헤아려 정성껏 보살피기를 머리카락 하나의 틈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두 아들과 며느리에게 부탁한다. 홍씨 부인은 시어머니(다산의 의붓어머니로 부친 정재원의 4번째 부인)를 모시며 지아비 없는 허전한 집을 지키며 생계를 꾸려 나갔다. 다산이 장모의 죽음을 슬퍼하며 생전의 공덕을 칭송하기를 “찾아오는 손님 머리 잘라 술상 차렸고 늙은 시 부모님께 방아를 찧어 즐겁게 해드렸다지”했는데 친정 어머니의 그 고운 심성을 홍씨 부인이 그대로 이어 받은 것이다.

 

- 유배지에서 여섯폭 다홍치마의 위안

사랑하는 지아비를 강진으로 유배보내고 자식들을 키우며 그리운 정을 삭이던 홍씨는 누에치기를 좋아하는 자신에게 시(珍詞七首贈內)를 지어줄 정도로 다정하였던 남편에게 시집올 때 입고 왔던 여섯 폭 다홍치마를 보낸다. 10여년의 유배생활에 몸과 마음이 지쳤을 지아비가 장롱 속 깊이 간직했던 빛바랜, 하지만 신혼시절의 추억이 스며있는 다홍치마를 보고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을까? 이에 다산 은 그 비단치마를 재단하여 두아들에게 교훈의 글을 써주고 외동딸에게는 매화에 새를 그린 매조도(梅鳥圖)를 선물한다. 지금 고려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림 아래 쪽으로 다음과 같은 4언율시와 그리게 된 사연이 적혀있다.

파르르 새가 날아 뜰 앞 매화에 앉네(翩翩飛鳥 息我庭梅)
매화 향기 진하여 홀연히 찾아왔네(有列其芳 惠然其來)
여기에 둥지 틀어 너의 집 삼으렴(爰止爰棲 樂爾家室)
만발한 꽃인지라 먹을 것도 많단다(華之旣榮 有賁其實)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 한지 여러 해가 지났을 때 부인 홍씨가 헌 치마 여섯폭을 보내왔다. 이제 세월이 오래되어 붉은 빛이 바랬기에 가위로 잘라 네첩을 만들어 두아들에게 주고 그 나머지로 족자를 만들어 딸에게 준다.(余謫居康津之越數年 洪夫人寄 敞裙六幅 歲久紅 剪之爲四帖 以遺二子 用其餘 爲小障 以遺女兒)

은은한 매화향기에 취해 쓸쓸한 유배생활의 위안을 삼고 있는데 어디선가 날아온 한 마리 새가 정원의 매화나무에 앉는 것을 보고 다산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꿈속에서라도 보고 싶은 부인이 혹 새가 되어 날아온 것은 아닐까? 바다 건너 흑산도에 계시는 약전 형님이 보고 싶은 마음을 새에게 대신 보내지는 않았을까? 찾아오는 이 없는 쓸쓸한 유배객을 위로하려 먼저가신 아버님이 보낸 귀한 친구인가? 지필묵을 꺼낸 다산은 몇 해 전 부인이 인편에 보내온 시집올 때 입었던 색바랜 다홍치마를 꺼내 그 위에 애절한 마음을 그리고 안타까운 심정을 시로 적어 외동딸에게 선물한다.

 

- 자식들에게 따뜻한 아버지 다산

학문을 게을리 하는 아들을 다산은 유배지 강진으로 불러 직접 가르친다. 유배초기 서슬 퍼렇던 관가의 감시가 시간이 흐르자 조금씩 풀렸다. 이에 다산은 1805년 겨울 유배지를 찾아온 장남 학연과 읍내 고성사의 보은산방에서 함께 묵으며 주역과 예기를 밤낮으로 가르쳤다. 유배 중 네 번의 교정을 거쳐 완성한 <주역>과 함께 <예기> 를 꼭 읽어야 할 책으로 말하고 <독례통고(讀禮通考)>라는 책을 인편으로 보낼 정도로 예에 연구에 각별하였던 다산인지라 아들에게 직접 예기에 대해 강론하였던 것이 다. 이때 예에 대한 학연의 질문에 답변한 것을 기록하여 모아 놓았는데 이름하여 스님들이 묵는 암자에서 묻고 답하였다 하여 <승암문답(僧庵問答)>이라 하였다. 유배지 를 다산초당으로 옮긴 1808년에는 둘째 아들 학유를 옆에 두고 오경 가운데 <주역> 과 <춘추>를 읽도록 하였다. 큰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산은 둘 다 가까이 두고 직접 가르치고 싶지만 가정형편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고 하며 읽어야 할 책의 순서를 꼼꼼히 적고 있다. 이 외에도 그가 집으로 보낸 편지를 보면 옆에서 직접 가르치며 학문의 진척을 점검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주지 못하는 아버지의 걱정이 구절구절마다 깊이 배어 있다. 이렇게 공부에 대해서는 엄격하였던 아버지였지만 모든 부모가 그러하듯 어린 자식의 죽음에는 한없이 약한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외동딸에게는 사내아이와는 또 다른 애틋한 부정을 느낀다. 아들에게 보내 는 편지에서 “고향으로부터 기별이 오면 보기도 전에 마음부터 졸인다”고 하였던 다산은 1802년 겨울 네 살짜리 막내아들이 죽었다는 비보를 접하고 간장을 쥐어짜는 서러움이 복받친다고 하며 슬퍼하였다. 귀양살이 떠날 때 과천 점포 앞에서 어머니 품에 안겨 아버지와의 기약 없는 이별에 슬퍼하던 그 아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여 몇 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였으리라. 눈앞에서 네명의 사내아이와 한명의 계집아이를 잃었을 때는 운명으로 생각하고 억지로 스스로를 위로하였으나 유배지에서 듣는 막내의 죽음은 끓어오르는 슬픔을 어떻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고통이었다.

“절하는 연습한다 예쁜모습 보여주고/ 술잔을 건네주며 웃음 띤 모습 절로 보여/ 오늘 같은 단오날 저녘/ 누구 있어 손에 쥔 구슬처럼 사랑하리”하고 어렸을 적 딸아이의 재롱을 그리워하면서도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던 다산은 어른으로 성장한 딸을 절친한 친구의 아들이자 제자인 윤창모에게 시집보낸다. 그리고 친정 어머니가 입고온 다홍치마 위에 매화와 새를 그리고 애절한 심정을 시로 적어 외동딸에게 선물한다. 아마도 시집간 딸에게 아버지로서 죄인의 몸인 것이 늘 부담스러웠을 것인데 그 미안함을 매조도에 담아 보내지 않았을까?....(이하 줄임 "다산 정약용 홈페이지"에서, 바로가기 (http://www.nyj.go.kr/dasan/01_int/05.j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