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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먼나라(해외)여행

발칸반도 여행(종편) -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모스타르, 사라예보)

by 삼도갈매기 2015. 6. 18.

 

 

 

 

 

발칸반도 여행 마지막 편은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 수도 "사라예보""모스타르"를 여행했던 이야기다.

 

이름도 생소한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는 19세기 말 유럽 제국주의 열강의 뜨거운 각축장이였다.

제1차 세계대전 도화선인 사라예보에서 일어난 오스트리아-헝가리 황제의 조카 암살 사건이다.

1992년 4월,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부터 독립하였으나. 보스니아 내전으로 고난을 겪었으며,

이로 인한 민족 간 갈등은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내부 분열 위기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크로아티아 드브로브닉에서 발칸여행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의 모스타르를 찾아가면서 휴게소에서 잠시 주변 풍경을 담는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소위 "구성민족"이라 불리는 3대 민족집단이다.

가장 규모가 큰 보스니아인(인구의 48%)이며, 세르비아인(37%), 크로아티아인(14%)이다.

"보스니아"와 "헤르체코비나"는 민족보다는 지명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이 나라는 보스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 중심의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 연방(국토의 51%)과

세르비아인 중심의 스릅스카공화국(48.5%)으로 사실상 갈라져 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과거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을 구성하는

여섯 개의 공화국 가운데 하나였으며, 1990년대에 유고슬라비아 전쟁 와중에 독립을 얻었다.

수도 ; 사라예보, 면적 ; 51,197㎢,(남한면적의 1/2) 인구 ; 387만명 (2014년),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 국기)

 

 

 

 

 

 

 

 

- 보스니아 민족간 화해의 상징 "모스타르 다리"(橋)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의 500년된 도시 "모스타르"(Mostar)에 도착.

모스타르는 아드리아해로 흘러드는 "네레트바"강(江) 연안에 있는 중세도시

인구 8만명의 모스타르엔 "모스타르 다리"가 있으며, 헤르체코비나의 수도였다,

(드브로브닉에서 모스타르까지 전용버스로 3시간 소요)

 

 

 

버스에서 내리니 지중해 날씨답게 무더운 날씨다..

모스타르 다리(스타리 모스트, 오래된 다리)를 찾아가는 길이다.

모스타르 다리는 1556년에 건설된 다리(橋)로 보스니아 민족간 화해의 징표다.

 

 

 

 

사진 중앙의 Restaurant(레스토랑)에서 중식(케밥)을 해결하였다.

바깥날씨가 더워서, 식당에서 케밥 먹는 시간이 즐거웠으니...

 

 

 

 

이슬람교도들이 사는 동네이고

오스만 트르크의 오랜 지배를 받았던 곳이라
상품의 문양이나 모습이 아랍쪽 문양을 하고 있다.

 

 

 

 

다리 근처에 "Don't Forget '93"이란 문구가 보인다.

내전이 한창이던 1993년 11월 크로아티아 군의 무자비한 공습으로 인해

보스니아인들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겼으니 후세에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리라..

(돌(石)보다는 동판에 새겼으면 하는 아쉬움이다)

 

 

 

 

숱한 내전을 겪은 나라답게

탄피를 이용하여 문구류(볼펜)을 상품화 하여 판매한다...

 

 

 

 

 

이 도시에서 유명하다는 "모스타르 다리"(스타리 모스트)에 도착하였다.

1556년 이스탄불의 유명한 건축가 미마르 하이루틴(Mimar Hayruddin)이 건설한 터키풍 아치형 석조다리로.

길이 28.6m, 높이 19m, 넓이 4m로, 오스만 투르크가 발칸반에 남긴 가장 아름다운 교각(橋脚)이다.

 

 

 

 

 

네레트바(Neretva) 강 위의 모스타르 다리 한가운데서 위 아래 방향으로 사진을 담는다.

 

 

위 사진은 모스타르 다리 하류쪽 풍경으로 기독교 지역의 풍경이며

아래 사진은 다리 상류 풍경으로 이슬람 지역의 풍경이 이채롭다.

(모스트 다리를 경계로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공존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다리를 건너서 이슬람 도시쪽에서 모스타르 다리를 조망해 본다.

 

 

 네레트바 강을 끼고 건설된 다리로 1556년~1566년에 완공한 다리..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 국가의 상징물인 Mostar Bridge는 1993년 파괴된 후

전 후 유럽국가들의 지원으로 중세의 것과 똑 같이 2004년 7월 재건축되었다.

 

 

 

 

 

 

피사의 사탑,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만큼이나 중요한

중세의 모스타르 다리는 2004년 7월 촬스 황태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재개통 되었으며, 200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주변 가게에서 모스타르 다리가 그려진 기념품을 구입하고

다음 여행지인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로 출발하기 위해 이동하였다.

 

 

 

 

구시가지를 벗어나 버스 정류소로 이동하기 위해 시내로 나왔다.

위 아래 사진은 호텔이었으나 내전으로 파괴된 후 방치된 건물들.
이지역은 유네스코 문화유산 보호구역으로 복구는 쉽지 않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서 복구를 미루고 있단다.

 

 

가장 치열했던 내전 지역이라 건물 외벽엔 총탄자욱이 남아있다.
세월이 흘렀지만 이들은 끝나지 않은 전쟁속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듯....

 

 

 

 

내전당시 민족살상의 산물인 탄피를 이용하여 각종 소품을 만들어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있다.

두번의 내전을 격은 이곳은 2개의 종교지역으로 갈려서 서로 다른 문화권을 형성하며 살아간다.

한번은 유고연방에서 독립하면서, 두번째는 다리를 사이에 두고 크로아티아계와 보스니아계의 내전이었다.

 
다리(橋)를 사이에 두고 수백년을 살아온 이들은 어느날 서로에게 총칼을 들이대고 살상을 하였다.

자신의 부모를 누가 죽였고 누가 무슨짖을 했는지를 다 알고 살아가면서 그들의 대한 감정이 사라질수 있을까.

풀리지 않는 앙금으로 그들은 또하나의 불씨가 될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프고 마음까지 무거웠다.

 

대략 2시간의 모스다르 다리와 시가지 여행을 마치고,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 수도 사라예보로 출발하였다.

 

 

 

 

- 사라예보 시내 관람.

 

 

사라예보하면 우리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1973년 4월 10일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개최된

32회 세계탁구선수권 대회때 여자 대표팀이 금메달을 차지했던 일이다..

 

 

전쟁 전 사라예보는 아름다운 전경을 가진 터키식 바자르가 있는

풍부한 역사의 장으로 유럽에서 가장 동양적인 도시였다,

 

1914년 6월에 발생한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암살되었던 사라예보 총성이

제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역사적으로 유명한 도시다.

 

시내를 흐르는 미리야크 강변에는 이사건을 기념하는 작은 박물관이 있고

주변에 이슬람풍의 거리와 다수의 모스크, 성당 등이 있다.

 

16세기경에는 터키의 이스탄불 다음으로 큰도시였다는데,

지금은 인구40여만으로 낙후 되고, 내전중 중앙도서관의 책이 90% 소실 되었다니.

어떤 이유로라도 전쟁은 없어야 할것이다.

 

 

 

 

 

모스타르에서 수도 사라예보로 가는 길..

진기한 풍경들이 차창을 스치는데, 와인 생산지 답게 주변에 포도밭이 즐비하다..

날씨는 무더운데 사진속 높은 산에는 흰눈이 쌓여 있으니 이곳이 고지대임을 알수 있다.

 

 

 

 

 

 

 

전용버스로 2시간 30분쯤 소요되어 수도 사라예보에 도착.

사라예보에 도착하면서 위 사진에서 처럼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면서

천둥과 번개가 요란하더니 땅콩 크기만한 우박이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비극의 현장 "라틴 다리"가 있는 마리야크 강가에 도착.

 

슬픔을 간직한 도시답게 비와 바람이 몰아치면서 일행을 반긴다..

이번 발칸여행은 첫날에 비가 내리더니 마지막날에도 비를 뿌린다...

 

 

 

 

 

마리야크 강변을 따라 걷는데...바람까지 거세다.

전에는 시청사였으며, 현재는 국립 도서관으로 사용한단다.

 

 

 

 

 

비극의 "라틴다리"를 찾아서 걷는다..

오전엔 날씨가 맑고 화창했는데...비와 바람이 몰아친다.

현지에서 한국 가이드가 합류하여 한국말로 설명하고 일행은 Recever로 듣는다.

 

 

 

 

 

비극의 현장 "라틴 다리"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 민족 주의자

청년 4명은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탄 자동차가

다리를 건너는 것을 보고 폭발물을 투척하지만 실패로 돌아간다.

 

하지만 황태자 부부는 폭발물에 의해 부상을 당한 수행원을 병원에 후송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 청년들 중 "프린치프" 청년이 쏜 2발의 총탄에 의해 저격을 당하며

오스트리아가 1914년 7월 28일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가브릴로 프란치프"는 1894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아홉 남매 중 일곱번째로 태어났다. 그는 매우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초등학교를 마치고 자신의 형이 머무는 사라예보에 보내지게 된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프란츠-페르디난드 황태자 부처가 스무 살의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총에 맞아 사망한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인류 역사의 대재앙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었다. 역사는 프린치프를 세르비아의 민족주의 지하테러단체 ‘검은손’의 멤버이자 세르비아 비밀경찰과 군부의 지원을 받아 ‘범행을 저질렀다’고 기술하지만, 그는 세르비아의 국민 영웅이다. 세르비아에는 안중근 의사와 같은 성인(聖人)인 것이다. 1차 대전 발발 100주년을 맞아 ‘민족과 국가를 위해’ 생명을 바친 애국정신이 나라마다 재평가되면서 그를 저격범으로 보았던 시각이 점차 변했다.

그가 황태자 부처를 저격한 6월 28일은 세르비아의 중요한 기념일인 ‘비도브단’(Vidovdan: 성 비투스의 날)이다. 1389년 코소보전투에서 세르비아의 라자르 대공이 오스만 제국의 무라트 1세 대군을 맞아 장렬히 전사한 날이다. 비록 전쟁에서는 졌지만 ‘이슬람의 저지를 위해 희생한 거룩한 기독교정신’과 적에게 굴하지 않는 세르비아 민족의 독립정신을 기리는 성스러운 기념일이다. 세르비아가 알바니아계 주민이 차지한 민족의 성지인 코소보를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바로 이 성스러운 기념일에 프린치프는 거사하였고 그의 ‘대세르비아’의 꿈은 전후 유고슬라비아왕국 창건으로 실현되었다. 정작 그는 1918년 4월 전쟁이 끝나기 직전 감옥에서 죽었지만, 종전 직후인 1920년에 유고슬라비아의 ‘민족영웅’으로 추서되었고, 지금 동유럽 일곱 개 도시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으며 프린치프 박물관도 있다. 1921년에는 6월 28일이 공식 기념일로 제정되었다. 오는 6월 28일 사라예보에 거사 100주년을 맞아 거대한 그의 기념비가 제막된다. 베오그라드에도 똑같은 복제품이 세워진다.


이런 프린치프를 ‘테러범’으로 묘사한 호주의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클라크의 책이 간행되자 세르비아 대통령까지 나서 맹렬하게 비난했다. 진정한 전쟁범죄는 발칸반도를 침략한 오스트리아 제국이지 이를 응징한 프린치프가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은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의사’가 되기도, ‘테러리스트’가 되기도 한다. 오늘의 세계적인 추세는 자신이 보기에 테러리스트일지 몰라도 상대방에게 의사이면 의사로 인정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 국제적인 예의가 되었다. 런던의 한복판 트래펄가 광장은 프랑스가 해전에서 영국에 진 곳의 이름이지만, 이를 바꾸라는 프랑스 사람은 없다. 새삼 일본을 생각한다.

[이원복(덕성여대 석좌교수)의 세계 속의 한국]의사(義士)와 테러리스트 가브렐로 프린치프(중앙일보)2014. 6. 26일에서 발췌)

 

 

 

제1차 세계대전은 4년반 동안

6,000만명의 젊은이가 전쟁터에 끌려가서

900만명이 사망하고 세르비아 인구의 23%가 희생되었다..

전쟁은 민족주의가 발동해 러시아, 영국, 독일, 프랑스까지 개입하였다.

 

 

 

황태자 부부가 저격당했다는 라틴다리를 건넌다..

이 사건으로 인해 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그런 사실을 말해주는 듯 역사의 현장엔 그들의 눈물과 한숨(비와 바람)을 뿌리고 있었으니...

(교각 길이 39m, 교각 넓이 4.3m, 높이 2.4~3m로 재질은 대리석과 테러코타 재질)

 

 

 

 

라틴다리 입구에 있는 박물관

바로 이 건물 코너에서 총격을 가했다고 한다.

그때는 카페 건물로 사용하였으며, 현제는 시에서 매입해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벽면엔 그때의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라틴 다리를 건너 사라예보 명품거리 "페르하디야"(Ferhadija)거리..

한국의 서울 명동쯤으로 생각하면 된다는데..

 

 

 

 

그 옛날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머물렀던 호텔로..

현재도 호텔로 사용하며 이곳을 찾는 각국의 정상들이 묵는단다.

얼마전 반기문 유엔사무총장도 이곳에서 묵엇단다.

 

 

 

15세기 오스만 트르크 제국때 건축했다는

상점과 여관터는 돌을 이용한 건축물들의 잔해들..

 

 

 

 

 

바로크 양식으로 1868년 건축된 "사라예보 정교회"(Sarajevo Orthodox Church)

보스니아 내전(1992~1995)에 파괴되었다가 1999년에 재건축된 건물로.

5개의 돔으로 건축, 내부에는 정교회 특징인 이콘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카톨릭의 상징인 대성당으로 파리의 노틀담 성당을 본딴것이란다.

고딕양식을 기본으로 네오고딕, 로마네스크를 가미, 1889년 재건축되었다.

입구 오른쪽 회색의 동상은 "바오르 2세"

 

 

 

 

위 성당입구를 확대한 사진으로

장미창에 예수상을 보면 손가락 3개를 펴고있는데.

성부와 성자와 상령의 삼위일체를 의미한다.

 

 

 

 

발칸반도 10대 모스크 중의 하나인 "가지후스레프 베그모스크"

1521~1541 보스니아를 통치하던 가지후스레프가 오스만 슐탄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건축물,

 

 

 

가지후스레프 베그모스크 오른쪽에 자리한 건축물로

모스크 사원 교주들의 사후 안식처라고 한다.

 

 

 

 

터키의 장인거리 "바슈카르지아"(Bascarsija)광장에 도착.

비가 내리지 않았더라면 몇곳을 더 관람할수 있었는데.....아쉬웠다.

 

 

 

오스만 투르크 시절부터 형성되었다는 바슈카르지아에는

가게안쪽에는 장인들이 공방을 차려놓고 가죽제품, 금은세공, 직물 등을 짜고 있다.

 

이곳에서 쇼핑을 위한 자유시간을 주었지만, 비가 내려서....

 

 

 

완전 수공업으로 만든 금속공예품들..

전쟁때 사용하던 총알 등을 공예품(볼펜)으로 만들어 팔기도 하는데,

공항에서 비행기에 탑승 출국하다가 무기로 착각하여 곤욕을 치루기도 한단다.

 

 

 

 

비가 내리는 와중에 사라예보 도심관광을 마쳤다.

 

도심 한가운데 미리야크 강변 주변 풍경으로

이슬람교의 상징인 모스크탑의 첨탑 "미니렛"이 세워져 있다.

 

 

 


 

 

발칸반도 4개국(몬테네그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 8일간 여행을 마치고

사라예보 공항에 도착하여 경유지 터키 이스탄불 공항으로 출발하기 위해 잠시 휴식을 취한다.

 

"여행이란 설레임으로 시작하여 아쉬움으로 끝을 맺는다"고 하더니....역시 아쉬움이 남는다..

아내 친구들과의 여행이 조심스러웠는데 그녀들 또한 나를 배려해 주었으니 무사히 여행을 마칠수 있었다.

그녀들의 여행 이야기는 앞으로 계속될 것이며...다음엔 부부가 함께 여행하면 더욱 좋을 것이라 상상하면서?..

 

P.S ; 이번 여행의 경유지였던 "터키 이스탄불"에서 반나절을 보내면서

주변을 관광했던 사진 등을 정리하여 다음편에 보여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